창녕조씨족보(1835년)와 1728년 무신혁명, 정배죄인들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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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4-06-29 13:33 조회2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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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정 기원 후 사을미(崇禎 紀元 後 四乙未), 즉 1835년(헌종1) 12월에 간행한 창녕조씨족보(昌寧曺氏族譜)다.
1728년(영조4년) 3월무신혁명(戊申革命)<1>으로 정배(定配)된 인물들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족보다.
1835년(헌종1) 섣달 상순(上旬) 후손 조영진(曺英振, 1787~?)이 1728년 무신혁명 실패 후 북한지역 정배지에서 해배돼 살고 있는 재종형에게 위 족보 1권을 증정한 것이다.
*양주군 석적(광적) 지역에 세거한 조영진(曺英振) 아들은 조석창(曺錫昌 1808~?), 아버지는 조윤두(曺允斗 1744~1796), 조부는 조명우(曺命佑 1694~1758, 생부: 曺夏規), 증조는 조하장(曺夏長, 조시일 삼남), 고조는 조실구(曺實久), 처조부는 풍양 조재광(趙載廣)이다. 조하장 생부는 합천 묘산면 안성리 공청도사 조시일(曺時逸, 1607~1644, 증손: 조정좌·정임)이다.
이 1835년(헌종1) 족보는, 앞서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 1552~1621)이 간행한 '이양당보(二養堂譜, 參判譜)'와 군위현감 때인 1650년(효종1) 조실구(曺實久, 1591~1658, 조탁 손자, 조실원 형, 필선 정뇌경 자형)가 간행한 '군위보(軍威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창녕조씨족보는 경기 광주 및 안동 풍천(가곡) 출생인 조세추(曺世樞, 무신혁명 때 능지처사)의 종증조부인 조실원(曺實遠, 1634~1704, 조탁 손자, 조명욱 차남) 후손들(북한 거주)이 간행한 뒤 소장하고 있었다. 후손 조규화씨(1980년 당시 약 51세, 삼익건설 과장 재직)가 북한에서 살다가 6.25 때 남쪽으로 피난 나오면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를 창녕 대합면 평지리 당상곡 조영욱씨가 1980년 서울에서 복사한 것이다. [조영욱은 1990년 창녕조씨태복경파보에 입적-등재된 인물이다.]
무신혁명 실패 후 함경도-평안도-강원도 등지로 정배됐던 조탁(曺倬)→조명욱 후손 중, 조실원 후손(정배죄인)들이 간행한 족보다.
하지만 조실원은 증손대(曾孫代)에 절손(絶孫)됐다. 조탁(曺倬)→조명욱(曺明勗)→조실원(曺實遠, 조명욱 차남)→조하시·하규(曺夏時·夏規)→조명순·명우(曺命淳·命佑)→조윤중·윤신(曺允中·允信)으로 이어지다가, 조명순(曺命淳, 조하시 장남) 아들(조윤중·윤신)대인 1850년 전후 절손된 것이다.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조몽정(曺夢禎)→조탁(曺倬)→조명욱(曺明勗)→조실구(曺實久,조실원 형)→조하장·하주(曺夏長·夏疇) 가문은 1744년(영조20) 영조 어명에 따라 조명우(曺命佑, 조하규 장남, 조하장 5촌조카)가 입적됐지만, 조명우 현손인 조완승(曺完承)대에 절손(絶孫)된다. 이것 역시 사유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조완승은 조실구 7세(6대)손이다.
1835년(헌종1) 12월 발간한 창녕조씨족보는 조몽정(曺夢禎, 1535~1595, 유학, 조몽길 8촌동생)에서 조세추(曺世樞, 1703~1728)까지 이어진 세계(世係)와 이른바 정배죄인(定配罪人)들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문서다. 아쉽게도 조몽길(曺夢吉, 1521~1561, 유학, 조몽정 8촌형)에서 조항(曺沆, 1676~1715,조성좌 아버지)으로 이어진 세계(世系)는 자세하게 돼 있지 않다.
이지정(李志定, 1588~1650) 사위인 전력부위(展力副尉, 종9품) 조실원은 조세추 증조부인 한성판관 조실구(曺實久, 1591~1658, 조명욱 장남)의 동생이다. 조실원은 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 1572~1637, 사위: 경창군 이주) 차남이고, 조실원의 장인 여주목사 이지정(李志定)은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지정은 이하진(李夏鎭, 성호 이익 아버지)의 백부다.
조실구(군위현감-한성판관) 매제는 선조 9남인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 1596~1644)고, 조실구 장인 유희분(柳希奮, 형조판서, 문화유씨)은 광해 손위 처남인데, 1623년(광해 말년) 계해정변(인조반정) 때 동생 유희발(柳希發, 이조참판)과 함께 서인 정변세력인 이귀 김류 등에 의해 참형됐다.
그동안 이 족보는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후손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80년에야 알게 됐다. 조실원 및 조세모·세추·응창(응도) 후손들이 1728년(영조4) 무신혁명 실패 후 함경도 명천·길주·갑산으로 정배되고, 1744년(영조20) 경 속량(贖良)·면천(免賤)돼 북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족보에서만 '世模(세모)가 함경도 明川府(명천부)로, 應道(응도, 초명: 應昌·응창)가 吉州牧(길주목)으로 '奴定配(노정배)'라고 유일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능지처사된 景溯(경소) 아들 世萬(세만, 일명: 昌道·창도)은 함경도 甲山府(갑산부)로 정배돼 전주이씨 완창대군파 이만경(李萬慶)의 사위가 된 것으로 등재돼 있다. 승정원일기와 역옥추안 등에서 世萬(세만)을 내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1835년 12월 족보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승정원일기 등에 조세추(曺世樞, 능지처사)의 딸(분순)이 함경도 길주목으로 어머니(홍씨)-남동생(응창)-증조모(연안나씨, 부: 羅星翼)와 정배됐고, 조선(趙銑, 조관규 조카)은 함경도 안변부(安邊府)로 정배된 거로 나온다. 그런데 족보에 딸 조분순(曺分順)이 조선(趙銑, 조희규·趙曦奎 아들)과 결혼하고, 조세추 아들 응도(應道, 일명: 응창)가 남원박씨(南原朴氏)와 결혼하여 아들(3명)-손자(5명)가 태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중요한 사료다. 승정원일기 및 무신역옥추안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728년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 이인좌의 난) 후,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형률(刑律)-도적(盜賊) 277조(모반대역) 규정에 따라 만15세가 안 된 관계로 죽지 않고 정배된 조세모·세만·응창(응도)·연안나씨·홍씨·조분순 등이 정배되지 않은 일족들과 서로 교류하고, 또 1744년(영조20) 전후 평민으로 감형돼 결혼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강원도 평해군으로 정배된 조세추 장남 조득수(曺得壽, 8세)는 1835년 족보에는 없다.
길주(吉州) 성문(城門)거리다(1907년 사진). 조세추(曺世樞, 능지처사)의 배위 남양홍씨-아들(조응창)-딸(조분순)-증조모(연안나씨), 충청감사 권첨(權詹, 1664~1730, 장살)의 증손인 정배죄인 권완(權浣, 1763~?, 일명: 권인손·權仁孫)과 배위 순창조씨(淳昌趙氏)도 봤을 함경도 길주목 성문거리다.
조실구·실원 후손들(북한 거주)이 1835년(헌종1) 12월 간행한 창녕조씨족보가 얼마나 정확하게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1835년 이 족보에 실패로 조하주(曺夏疇, 1650~1725, 8촌형: 조하장) 계배 , 1677년생와 증손이며 아들인 과 의 처 , 이조판서 홍우원 손녀는 함경도 길주목으로 정배되고, 의 동생 는 함경도 명천부
이는 경기 이천에서 무신혁명 때 핵심 인물로 1728년(영조4) 장폐된 선비 임서호(任瑞虎, 51세) 문중 사례와도 유사하다. 임서호·서봉·서린(능지처사 및 참형됨)의 10촌 형인 임석구(任錫龜, 1670~1746)는 무신혁명 후 아내, 자식, 노비와 함께 경상도 단성현으로 정배됐다.
그 후 향촌에서 뿌리를 내려 산청군 단성면 일원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바로 북인(北人) 이조판서 임국로(1537~1604) 후손인 풍천임씨(豊川任氏)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단성 지역 정배인의 존재 양태(심재우, 한국학보 27권 1호, 2001), 대명률직해 권18 형률-도적(규장각, 2001)
창녕조씨족보(1835년 발행) '조명우(曺命佑) 란'에 등재돼 있다. 정배돼 북한에서 거주하고 있던 조몽정(曺夢禎)-조탁(曺倬)·척(倜)·길(佶) 창녕조씨(昌寧曺氏) 후손들이 1835년(헌종1) 12월 발행한 창녕조씨족보 5권 12쪽이다.위 족보 기록은 "갑자년(甲子年, 1744년 영조 20년)에 문장(門長) 조하격(曺夏格) 등(等)과 참판공(參判公, 공조참판 조탁) 외손(外孫) 유판서복명(柳判書復明)과 부사(府使, 이천부사 조명욱) 외손(外孫) 이승지게(李承旨垍)와 정유상(鄭有相) 자(子) 정진주(鄭鎭周)와 후손 조하장(曺夏長, 조하규 4촌형)과 의견을 모아 (영조 임금에게) 상언(上言)하여, 임금 특명(特命)으로 부사공(府使公, 이천부사 조명욱) 혈손(血孫) 조하규(曺夏規) 자(子) 조명우(曺命佑, 조실원 손자)를 (양자로) 세워 제사를 모시게 했다."는 내용이다.
1835년(헌종1) 12월에 간행한 창녕조씨족보(昌寧曺氏族譜) 권5 12쪽이다. 위 우측 붉은점에 갑자년(甲子年) 1744년(영조20) 영조에게 상언(上言)한 것이 나와 있다. 즉 조명욱(曺明勗, 이천부사, 조세추 고조) 사위인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의 6세손 이게(李垍, 1707~1757, 정언·동부승지)를 비롯한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 참판, 조세추 5대조) 사위인 유윤창(柳允昌, 1583~1647, 군수)-창녕조씨(1583~1636)의 현손 유복명(柳復明, 1685~1760, 판서, 파주 출생)과 조명욱 외증손인 유학 정진주(鄭鎭周, 1676~?, 이천 출생)가 갑자년(甲子年) 1744년(영조20) 영조에게 상언(上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진주 8대조는 호조판서·우참찬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고, 7대조는 흥해군수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이며 정광보 동생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이다. 하지만 조명우(曺命佑, 아들: 曺允升·允斗) 현손(玄孫-조완승)대인 1850년 전후 절손(絶孫)돼 몰락했다. 왜 절손됐을까. 현달한 경창군 후손(동부승지 이게 등)들과 노론 실세(實勢)인 대사헌·형조판서 유복명(柳復明)과 그 후손들의 배경이 탄탄했는데, 몰락한 이유가 불가사의하다.
영조실록 4년 1728년 7월 23일, 영조실록 5년 1725년 3월 11일, 승정원일기 영조 11년 1735년 2월 5일, 승정원일기 영조 19년 1743년 6월 5일, 승정원일기 영조 20년 1744년 7월 6일, 영조실록 20년 1744년 8월 4일조와 맥락이 일치 한다. 중요한 자료다.1835년(헌종1)에 간행한 창녕조씨족보 권5 12쪽이다. 권완(權浣)과 사촌동생 권호(權浩)는 조선(趙銑)-창녕조씨(昌寧曺氏, 조세추 딸) 사위다.
권완 자형이 정배죄인 조윤국(曺允國, 1734~1796)인데, 조윤국은 정배죄인 조경회(曺景淮, 1686~1756, 조세추 삼촌)의 차남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4년 1728년 6월 23일조에 처형된 조명규(趙命奎, 조관규 동생) 조카인 조선(趙銑, 일명: 조항)이 함경도 안변부(安邊府)로 정배된 것으로 나와 있다. 창녕조씨족보(1835년)와 안동권씨족보에서 정배죄인(定配罪人)들 끼리 결혼하는 등 교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세추 7대조가 조몽정(曺夢禎, 1535~1595,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 부친)인데 조몽정 장인이 권혜(權蕙, 묘소: 양주군 독음면)이고, 권혜는 권첨(權詹) 고조부인 권극례(權克禮, 1531~1590, 이조판서)와 12촌지간이다. 이런 선대의 혼맥도 정배죄인 권완이 조세추(曺世樞, 1703~1728) 딸 조분순과 결혼하고, 조세추 사촌동생 조윤국이 정배죄인 권부(權裒, 1719~1763, 유배지 제주 대정현에서 사망, 권첨 손자)의 딸과 결혼하는 동인이 됐다.
*위 이미지 좌측 允國(윤국)의 처부(妻父)가 누락돼 있는데, 권부(權裒)로 판단된다.
위 족보는 형조참판 치재 조탁(恥齋 曺倬)-조탁 아들 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조명욱 차남인 전력부위(展力副尉, 종9품) 조실원(曺實遠)의 북한 거주 후손들이 1835년(헌종1)에 출간한 창녕조씨족보(昌寧曺氏族譜) 권지5(券之五) 12(十二)쪽이다.
위 족보에 하주(夏疇) 아들인 경하(景河)의 형 경수(景洙)·경사(景泗)는 누락됐지만, 경하(景河) 아들인 세모(世模)가 함경도 명천부(明川府)로, 세추(世樞) 아들 응도(應道, 초명: 應昌·응창)가 길주목(吉州牧)으로 '노정배(奴定配)'라고 등재돼 있다. 즉 1728년(영조4)무신혁명 후 '노비로 정배됐다'는 거다. 승정원일기 및 역옥추안에도 두 살이 안 된 아들 응창(應昌)과 누이 분순(分順)이 나와 있다. 이 내용과 족보가 일치한다. 중요한 자료다. 다만 강원도 평해군으로 정배된 조세추 장남인 조득수(曺得壽, 8세)는 위 족보에 누락돼 있다.
또한 정배죄인 조경회(曺景淮, 1686~1756) 아들 윤국(允國, 1734~1796)의 배위는 장폐된 충청감사 권첨(權詹, 1664~1730) 증손녀인데, 조윤국(曺允國)은 정배죄인 권완(權浣, 1763~?, 장모: 조세추 딸)의 자형이다.
조세추(曺世樞) 외조부 정석주(鄭淅周)는 조명욱(曺明勗, 이천부사) 세째사위(정지숙·鄭之叔)의 손자인 정진주(鄭鎭周, 1676~?)와는 일가 형님뻘이다. 예천 용문면 우망리 및 광주(군포) 속달리에 세거하고 있는 동래정씨직제공파인데, 정석주가 정배죄인이라서 족보에서 이름을 뺏다. 우망리는 무신혁명 조경수(曺景洙)·경사(景泗)·경회(景淮)가 세거한 상주 사벌면 매호리와는 8km 거리다.
정진주 조부인 정지숙(鄭之叔, 1606~?, 군포 출생)의 사위가 강릉부사 조기석(趙祺錫, 1643~1695)인데, 조기석 외조부가 창원부사 도계 조정생(陶溪 曺挺生, 무신혁명 조정좌·정임 고조부)이며, 조기석(趙祺錫) 둘째사위는 나주 부호로 무신혁명(戊申革命) 때 처형된 나만치(羅晩致, 밀양부사 나위소 증손)다.
정지숙 사촌형 대사간 정지호(鄭之虎, 1665~?)는 1675년(숙종1) 귀양 간 송시열의 죄악을 종묘에 고묘(告廟)해야 한다고 청(請)한 인물이다. 그후 정지호는 집권(서인)들로부터 두고두고 생원 이재헌(李在憲, 1631~1696) 및 생원 이인지(李麟至, 1683~1746, 부: 이재헌, 이모부: 조하현)와 함께 악인·도적으로 매도됐다. 이 세 사람이 “송시열을 바판하고, 송시열-송준길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비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문묘 종사 반대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상주 청리면 출생인 이재헌은조성좌의 종조부인 조하현(曺夏賢, 손자: 조명좌·희좌·순령)의 손위동서다.
유학 정지숙은 1744년(영조20) 정언 이게(李垍) 및 노론 실세(實勢)인 첨지중추부사 유복명(柳復明, 형조판서)과 함께 조명욱(曺明勗)-조실구(曺實久)-조하장·하주 봉사손(조명우)을 입적시키려고 영조 임금에게 상언(上言)한 인물이다.
1835년(헌종1) 12월 간행한 창녕조씨족보 권5 13~14쪽이다. 조실원(曺實遠, 1634~1704, 조부: 참판 조탁) 손자인 조명원(曺命原, 夏時·하시 차남)과 관련하여 생졸 및 묘소 위치는 없고, ‘子命源 戊申變落鄕居洪原/室完山李世建女(자명원 무신변 낙향 거홍원/실완산 이세건녀)’로 등재돼 있다. 즉 조명원이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낙향(정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록, 승정원일기, 무신역옥추안 등에는 기록이 없는데, 족보에 '정배죄인'으로 등재해 놓았다. 이를 보면 1835년 간행한 위 족보가 얼마나 정교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조실원 장인은 이지정(李志定, 1588∼1650, 영흥부사)이다.
위 이미지 창녕조씨족보 권5 13~14쪽에, 조실원(曺實遠, 1634~1704, 조부: 참판 조탁) 손자인 조명원(曺命源, 夏時·하시 차남)과 관련하여 생졸(生卒) 및 묘소 위치는 없고, ‘子命源 戊申變落鄕居洪原/室完山李世建女(자명원 무신변 낙향 거홍원/실완산 이세건녀)’로 등재돼 있다. 즉 조명원이 무신변란으로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낙향, 즉 정배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 중 하나다. 조실원 장인은 이지정(李志定, 1588~1650, 영흥부사, 성호 종조부)이다.
*이지정·이지안(李志安, 1601~1657, 성호 조부) 형님이 형조판서 이지완(李志完, 1575~1617)인데, 이지완 딸이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의 며느리로 갔다. 즉 이이첨 며느리 여주이씨는 성호 이익의 5촌고모이고,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의 이모다.
※1684년(숙종10) 갑자 식년 사마방목(甲子式年司馬榜目)에 따르면 조명원 아버지 조하시(曺夏時, 1659~?)는 안동(주: 풍천 가곡?)에 살고 있었고, 1684년 생원시 3등 70인 중 66위로 합격했다. 그후 조하시는 과의교위(果毅校尉, 정5품)를 지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위 조경수(曺景洙)·경사(景泗)·경회(景淮)외삼촌)은 성호전집 권53 등과기(登科記)에서 “(1728년 3월) 무신변란(戊申變亂) 후 명문거족, 이름난 사람, 유명한 선비, 고관대작, 지위가 미천한 사람을 불문하고 모두가 형벌(刑罰)을 당해 죽었고, 수년 동안 기상이 꺾여 무너진 것이 파멸적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된 것과 진배없다.”고 증언했다.
권전(權佺, 1583~1651, 안동부사 권집·權諿 삼촌)-양천허씨-진주소씨(蘇氏) 묘소: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검단마을에 있다. 권전 계배 진주소씨 아버지 소백복(蘇百福, 여산 출생)은 예조참판 신담(申湛, 1519~1595, 서천 한산 출생, 신중주 6세손)의 사위다. 신담은 현감 신득자(申得滋, 1569~1637)의 13촌 아재인데, 신득자 장인이 여산(礪山, 익산) 출생인 소순복(蘇純福)이다. 소순복-소백복은 진위(평택)에서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에 참여하여 풍비박산된 소성(蘇晟)·소면(蘇冕)·소정(蘇鼎, 41세)과 같은 문중이다. 무신혁명 때 남원출생으로 처형 및 정배된 소정(蘇檉, 41세)·소철(蘇撤)·소동철(蘇東轍) 등 진주소씨 문중과도 인척으로 판단된다. 신득자는 대사헌 신식(申湜, 청주 낭성 출생, 신숙주 7세손)의 아들인데, 신득자 현손인 신천영(申天永)은 무신혁명 때 충청병사에 추대된 인물인데, 참수됐다. 신득자 둘째 배위가 합천 쌍책 출생으로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 1551~1628, 함양군수, 매제: 대구도호부사 조응인)의 4녀인 전의이씨다. 신득자(申得滋, 매제: 김덕민 및 우의정 강석기) 동생이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을 비판한 도승지 신득연(申得淵, 1585~1647, 사위: 삼학사 오달제)이다. 신득연은 광해 등극에 기여한 공로로 1614년(광해6) 10월 조응인-조우인-조명욱-이대기-조정립-조정생 등과 함께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 1등(253명)에 책훈된다. 그후 귀양지 진도에서 1647년(인조25) 사망했다.권전(權佺)은 충청감사 권첨(權詹, 1664~1730) 증조부이고,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의 조카다. 정배죄인 권완(權浣, 권전 7세손)이 권첨(權詹) 증손자다. 권전(權佺) 양부 권겹(權韐, 1562~1643, 권필 형님)은 이조참판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9~1623)과 친했는데, 유몽인은 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 1552~1621)과 친했다. 유몽인은 이양당-치재 조탁(曺倬)이 거쳐하는 당호(堂號) '치재(恥齋)'를 노래하는 '치재기(恥齋記)'를 지었다. '치재(恥齋)'는 '부끄러움을 아는 집'이라는 뜻이다. 조탁(曺倬) 6세(5대)손이 1728년(영조4) 무신혁명 (戊申革命, 이인좌의 난) 때 처형된 조세추(曺世樞, 1703~1728, 손서: 권완) 및 조윤국(曺允國, 1734~1796, 처증조: 충청감사 권첨)이다. <이미지 출처: 서천문화원>
권첨(權詹)은 찬성사(贊成事, 정2품) 권근(權近) 11세손, 호조판서 권준(權蹲, 권근 4남) 10세손이다. 권근 9세손 권겸(權謙)은 이조판서 홍우원 장인이고, 홍우원 손서가 무신혁명 핵심 인물인 조세추(曺世樞, 장인: 홍항)다. <위 이미지 출처: 서천문화원-서천 안동권씨 문화와 유적, 2018년>
안동권씨대동세보(1961년) 9권 추밀공파보(樞密公派譜) 412쪽 무신혁명 때 장폐된 충청감사 권첨(權詹, 1664~1730) 족보다. 창녕조씨족보(1835년)와 일치한다. 권완(權浣, 1763~?, 일명: 인손-仁孫)은 조항(趙鎤, 일명:조선·趙銑)-분순(창녕조씨)의 사위로 길주에 정배됐다. 권완-배위(순창조씨) 묘소가 길주목 길성면 홍수동 형제봉 계좌(癸坐)에 있다고 돼 있고, 권완(權浣) 어머니 해주정씨는 남편(권부) 따라 제주도 유배지로 함께 갔고, 그후 득면(得免)돼 고향(주: 서천군 판교면 검단)으로 돌아 왔으며, 1784년(정조8) 차남 권완(權浣)이 고향에서 봉양하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자신이 사는 길주에 묘소를 썼다고 위 족보가 증언하고 있다. 권완 사촌동생인 권호(權浩)도 조항(趙鎤)-창녕조씨(昌寧曺氏) 사위다.
권완 자형이 정배죄인 조윤국(曺允國, 1734~1796)인데, 조윤국은 정배죄인 조경회(曺景淮, 1686~1756, 조세추 삼촌)의 차남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4년 1728년 6월 23일조에 처형된 조명규(趙命奎, 조관규 동생) 조카인 조선(趙銑, 일명: 조항)이 함경도 안변부(安邊府)로 정배된 것으로 나와 있다. 창녕조씨족보(1835년)와 안동권씨족보(1961년)에서 정배죄인(定配罪人)들 끼리 결혼하는 등 교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세추 7대조가 조몽정(曺夢禎, 1535~1595,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 부친)인데 조몽정 장인이 권혜(權蕙, 묘소: 양주군 독음면)이고, 권혜는 권첨(權詹) 고조부인 권극례(權克禮, 1531~1590, 이조판서)와 12촌지간이다. 이런 선대의 혼맥도 정배죄인 권완이 조세추(曺世樞, 1703~1728) 딸 분순과 결혼하고, 조세추 사촌동생 조윤국이 정배죄인 권부(權裒, 1719~1763, 유배지 제주 대정현에서 사망, 권첨 손자)의 딸과 결혼하는 동인이 됐다. 권부(權裒) 관련 내용은 권부 현손 권중룡(權重龍, 1898~1958)이 '승지(권기)공파보'를 가지고 월남했는데, 이 파보(가첩)를 보고 1961년(신축보)에 등재했다.
서천군 박수환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권첨, 권윤성 후손인 권중룡(1898~1958, 길주 출생)은 길주에서 자수성가하여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검단 고향에 다녀 가기도 했고, '길주 대부'라고 불렀다고 했다(권오훈-권병돈 증언). 위 족보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승지(권기)공파보'를 발간했다.
안동권씨대동세보(1961년) 9권 추밀공파보(樞密公派譜) 1132쪽이다. 충남 서천군 검단마을의 권오훈에 따르면, 권첨 후손들(권중룡 등)은 길주에서 인쇄업 등으로 자수성가하여 충남 서천군 판교면 검덕 고향에 다녀 가기도 했다고 한다. '길주 대부(권중룡)'이라고 불렀고, 위 족보처럼 북한에 세거한 권완(權浣)의 증손이며 권윤성(權允性)의 손자인 권중룡(權重龍, 1898~1958)이 '승지(권기)공파보'를 발간했는데, 이 파보(가첩)에 위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이를 검증한 후 1961년(신축보)에 등재했다고 말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위 이미지 안동권씨족보(1961년 간행) 1권 추밀공파보(樞密公派譜) 412쪽-인터넷(1124쪽)에 따르면, 충청감사 권첨(權詹) 증손이며 조선(趙銑)-분순(창녕조씨)의 사위인 권완(權浣, 1763~ ?, 일명: 인손-仁孫)은 길주로 정배됐다. 또한 권완 배위가 조항(趙鎤,조선·趙銑의 오기)의 딸(순창조씨)이 맞고, 권완-순창조씨 묘소가 길주목 길성면 홍수동 형제봉 계좌(癸坐)에 있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4년 1728년 6월 23일조에 처형된 조명규(趙命奎, 조관규동생) 조카인 조선(趙銑, 일명: 조항)이 함경도 안변부(安邊府)로 정배된 것으로 나와 있다. 창녕조씨족보(1835년)와 안동권씨족보(1961년)에서 정배죄인(定配罪人)들 끼리 결혼하는 등 교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권완이 어머니 해주정씨가 고향(서천군 판교 검단마을)에서 사망하자, 어머니 묘소를 자신이 정배돼 뿌리를 내린 함경도 길주 길성면 형제봉에 썼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권첨 증조는 서천군 화양면 입향조인 권전(權佺, 1583~1651, 안동부사 권집·權諿 삼촌)이다.
조세추(曺世樞) 7대 선조가 조몽정(曺夢禎, 1535~1595,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 부친)인데, 조몽정 장인이 안동권씨추밀공파인 권혜(權蕙, 묘소: 양주군 독음면)이고, 권혜는 권첨 고조부인 권극례(權克禮, 1531~1590, 이조판서)와 12촌지간이다. 이런 선대의 혼맥도 정배죄인 권완(權浣)이 조세추(曺世樞)딸 분순과 결혼하고, 조경회(曺景淮, 1686~1756) 아들 조윤국(曺允國, 1734~1796, 조세추 사촌동생)이 권완 누나, 즉 정배죄인 권부(權裒, 1719~1763, 권첨 손자, 유배지 제주에서 사망) 딸과 결혼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 이인좌의 난) 때 함경도감사 권익관(權益寬, 1676~1730, 정배지에서 사망)도 안동권씨추밀공파다. 귄익관 손자 권유(權維)도 1755년(영조31) 을해옥사 때 연루돼 처형됐다. 이는 조세추(曺世樞, 1703~1728) 7대 선조인 조몽정(曺夢禎, 1535~1595, 장인: 권혜·權蕙, 아들: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 때부터 혼맥을 형성한 안동권씨추밀공파 후손들이 1728년 무신혁명 때 참여한 결과였다. 무신혁명 때 양성현 구만리(九萬里, 안성시 공도읍) 양반 권서봉·서룡·서린(權瑞鳳·瑞龍·瑞麟)도 모두 처형됐는데,안동권씨종파(宗派)로 판단된다. 맏집인 안동권씨종파 후손들은 겨우 1천명 남짓 된다고 한다. 무신혁명 실패 때문일 것이다. 무신혁명 때 청주목사로 임명된 권서봉(權瑞鳳, 1678~1728, 안동권씨종파공파보에 이름만 등재됨)이 핵심 인물이다. 권서봉 동생 권서린(權瑞麟,1691~1728)은 이천 출생인 임서호(任瑞虎)·서린(瑞麟)처럼 강건(剛健)하고 사나워서 여러 차례 혹독한 형신(刑訊)을 받고도 박필몽 민원해 신석영처럼 한 마디도 진술하지 않고 장폐(杖斃: 곤장에 맞아 죽음)됐다.
*평안도 강서군 출생인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1883~1950)이조세추(曺世樞)·세모(世模) 후손일 수도 있다.
이처럼 정배죄인들은 1744년(영조20) 전후 양인(良人, 평민)으로 감형(속량)돼 배소지에서 정착하거나, 고향 또는 고향 인근으로 옮겨가서 살게 됐다.
이는 무신혁명 합천 핵심 인물인 조명좌(曺命佐, 1700~1728,조성좌 6촌 동생)의 장남으로 정배죄인 조행검(曺行儉, 1720~1804, 일명: 조낙손·曺洛孫, 처외조부: 칠곡 석전의 이신명<李申命, 부친: 참판 이원록, 조부: 사간 이도장>)이 1728년(영조4) 무신혁명으로 처형된 조일규(趙日奎, 조명규 동생)의 사위가 된 것과 같은 맥략이다.
조성좌(曺聖佐) 아들인 조인엽·신엽(曺仁燁·信燁) 등이 방면돼 고향 인근 오지인 삼가현 신원면 원만(元萬)마을에 정착한 것과 같은 이치(理致)다.
조인엽(曺仁燁, 일명: 만래·萬來(乃))의 배위가 초계정씨(草溪鄭氏)인데, 정씨(鄭氏)는 무신혁명 정희량(鄭希亮)의 가문이 아닐까 하는 것도.
*순창조씨세보(淳昌趙氏世譜) 130쪽에 조희규(趙曦奎) 장남 조침(趙鈂, 1709~1773)만 등재돼 있고, 조선(趙銑)은 없다. 고의로 누락했다. 아니면 무신혁명으로 아수라가 돼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경하(曺景河) 처부(妻父)는 박승동(朴升東, 부: 박위·朴緭)이고, 처증조는 의금부 도사 박수소(朴守素), 처고조는 경기감사·형조참판 박로(朴로)다. 또한 조경하는 부여 임천면의 금구현령 조현소(趙見素, 1610~1677) 외손서다. 정배죄인 조경회(曺景淮, 1686~1756) 처부는 상주 낙동면 풍양조씨인 조해(趙瀣, 1666~1734,호조좌랑 조정·趙靖 현손)다. 조경회 묘소는 부모 '조하주-연안나씨(합분)' 묘소가 있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68번지(23306㎡) 태현에 부모 묘소 아래에 있다.
유학 조해(趙瀣)는 조시량(曺時亮, 양산군수, 무신혁명 조성좌 증조부) 막내사위인 조태윤(趙泰胤, 1642~1707, 광주목사 조익·趙翊 증손, 후배·后配 부친: 허목 동생 허서)의 9촌 조카다.
특히 조해 맏사위 이홍인(李弘仁)은 무신혁명 이인좌의 막내 삼촌인데, 1728년 무신혁명(戊申革命) 실패로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나로도(羅老島)에 안치(安置)됐다. 조해 손아래 동서인 홍서귀(洪瑞龜)의 맏사위가 무신혁명 정희량 장조카 정의호(鄭宜瑚, 1698~1716)다.
홍서귀(洪瑞龜) 사촌 동생인 홍익귀(洪益龜,1692~1728, 이모부: 정희량 형 정찬유)는 1728년(영조4) 무신혁명에 연루돼 흥양(興陽) 등지로 발배된 후 유배지(流配地)에서 사망했다.
함창현(문경 영순면) 출생 홍익귀는 무신혁명 이인좌(李麟佐, 1695~1728.3) 매부이며, 부친은 홍상훈(洪相勛), 조부는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1620~1674, 사간)다. 홍상훈은 지례현감 유후광(柳後光, 유세철 차남) 맏사위이고, 또한 정찬유(鄭纘儒, 정의호 부친, 정희량 형님)의 손위동서다. 홍상훈 맏사위 이세황(李世璜, 교리 이한명 아들, 형조판서 이원정 손자)은 조숙(曺淑, 정희량 장인, 무신혁명 조석좌·정좌 부친)의 다섯째 사위이기도 하다. 조숙 맏사위는 정희량이다. 정의호 이종 사촌 형님이도 한 홍익귀는 상주 청리면 출생인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 1738~1816)의 외조부가 된다.
무신혁명(戊申革命) 실패로 정배된 조경회(曺景淮, 조세추 삼촌) 아들 조윤국(曺允國, 1734~1796)의 처증조는 1728년(영조4)무신혁명 때 군사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폐(杖斃)된 충청도감사 권첨(權詹, 1664~1730)이다. 권첨 손자 권유(權褎)는 1755년(영조31) 을해옥사 때 처형됐다. 권첨은 대제학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의 10세(9대)손이다. 권근 묘는 음성군 생극면 능안마을에 있다.
*1728년 능지처사된 조세추(曺世樞, 26세) 사위가 정배죄인 조선(趙銑)인데, 조선 사위인 권완(權浣, 일명: 인손-仁孫)은 권첨(權詹, 충청감사) 증손이다.
조세추(曺世樞, 1703~1728, 영남 부호)의 장인 홍항(洪沆)은 이조판서 남파 홍우원(南坡 洪宇遠, 1605~1687, 안성 대덕면 출생)의 아들이다. 홍우원은 1680년(숙종6) 경신환국 때 서인들에 의해 명천부로 유배되고 배소지(함경도 문천)에서 사망했다. 홍우원 외조부가 계해정변(1623년) 후 관작추탈된 이조판서 허성(許筬, 허균 큰형님)이다.
위 창녕조씨족보에 있는 조경하(曺景河)·경강(景江)·경회(景淮)의 외삼촌이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이며, 성호 자형은 영남 거부인 매호 조하주(梅湖 曺夏疇, 1650~1725, 8촌형: 조하장). 조하주는 병조판서 목창명의 손아래 동서이며, 당색은 윤휴·허목·홍우원의 청남(淸南)이다. 성호 누나, 즉 조하주 첫째 아내인 여주이씨는 1649년 출생하여 1695년 사망했다. 여주이씨(呂州李氏) 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만운저수지 위 종미골 산 118-6번지 이양당 조탁 종산(宗山)에 있다. 위 족보에 조하주 계배인 연안나씨(延安羅氏) 사망년인 경자(庚子, 1720년)는 오기(誤記)다.
조하주는 1676년(숙종2) 6월 학유(學儒)일 때, 대사헌 윤휴(尹鑴)가 실세(實勢)인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을 공격한 뒤 물러나자, 사학(四學) 유생을 대표하여 윤휴를 소환(召還)하라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되는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다. 1675년(숙종1) 남인(南人)으로부터 분파된 청남은, 서인(西人)의 좌장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좌의정)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는데, 북인계(北人系)인 백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 이조판서)가 청남(淸南)의 영수였다. 부호(富豪) 조하주는 청남의 돈줄 역할도 했다.
조하주(曺夏疇) 아들 및 손자인 조경수·경사·경하·경강·경소, 조세추는무신혁명 때 처형됐다.
*검간 조정(黔澗 趙靖, 1555~1636)은 1608년 1월 광해 등극 공로로 1614년(광해6) 10월 11일에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 841명) 1등(253명)에 정(正, 정3품) 조명욱(曺明勗, 조경수·경하·경회증조부) 및 현령 조응인(曺應仁, 조성좌 5대조)-찰방 조우인(曺友仁) 등과 함께 녹훈된다. 당시 조정(趙靖)은 군수였다. 조정 처부는 김극일, 처삼촌은 김극일 동생인 학봉 김성일이다.
호조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 1552~1621) 후손들이 1835년(헌종1)에 간행한 창녕조씨족보(昌寧曺氏族譜) 5권 13쪽이다. 조하주(曺夏疇, 1650~1725) 사위이홍덕(李弘悳) 등 7명이 등재돼 있다. 조하주 서자 경소(景溯)는 능지처사됐다. 아들 세만(世萬, 昌道)은 전주이씨 완창대군파 이만경(李萬慶)의 사위인데 갑산(甲山)으로 정배됐다. 중요한 자료다. 역옥추안 등에서 세만(世萬)-창도(昌道)를 내가 확인하지 못했는데도 족보에 이렇게 등재돼 있다는 건, 북한 거주 조실원(曺實遠, 1634~1704)-조하주 후손들 상호 소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아마도 경창군 이주 6세손인 이게(李垍, 1707~1757, 정언·동부승지) 및 유복명(柳復明, 1685~1760, 노론 형조판서)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1835년(헌종1) 조몽정-조탁-조명욱-조실구-조하주 훈손들이 간행한 창녕조씨족보 권지5(券之五) 16(十六)쪽이다. 상림(上林, 1361~1421) 6대(7세)손인 조탁(曺倬, 1552~1621, 참판) 외동 사위 유윤창(柳允昌, 군수, 매제: 영의정 이경석)과 현손 만촌 유복명(晩村 柳復明, 판서)이 등재돼 있다. 사위(유윤창) 후손들을 세세하게 별도로 등재했다. 유복명(동지중추부사) 등은 1744년(영조20) 영조에게 상언(上言)하여 영조 특명으로 조하장(曺夏長)·하주(夏疇)의 봉사손으로 조하장 5촌조카 조명우(曺命佑, 1694∼1758)를 입적시켰다. 경창군 6세(5대)손 정언 이게(李垍, 서천군 이황 손자)도 큰 역할을 했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에 세거한 조명욱 맏사위 경창군(慶昌君)의 6세(5대)손 이게(李垍, 承旨-승지)와 정진숙(鄭之叔)의 손자 정진주(鄭鎭周)가 보인다.창녕조씨족보 권지5(券之五) 13(十三)쪽이다. 참판 조탁(曺倬) 둘째사위 남두춘(南斗春)도 등재돼 있다. 사위(경창군-남두춘-정지숙-박수화) 후손들을 별도로 자세하게 등재했다. 정진주(鄭鎭周)는 조경강(曺景江, 조세추 부친)의 장인인 정석주(鄭淅周)의 친척 동생이다. 동래정씨인 정진주 8대조는 호조판서·우참찬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고, 7대조는 흥해군수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이며 정광보 동생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이다. 광주(군포) 속달리 및 예천 풍양면 우망리에 동래정씨직제공파가 세거하고 있다.
1835년(헌종1)에 간행한 창녕조씨족보(昌寧曺氏族譜) 권5 11쪽이다.
1835년(헌종1)에 간행한 창녕조씨족보(昌寧曺氏族譜) 권5 12쪽이다. 맨 아래 이미지 우측 붉은점에 갑자년(甲子年) 1744년(영조20) 영조에게 상언(上言)하여 조명우(曺命佑)를 양자로 들였다는 것이 나와 있다. 조하장(曺夏長, 1634~1661) 양자 조명우(曺命佑, 1694~1758) 묘소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68번지(23306㎡) 태현에 있는 삼척부사 조등(曺璒, 1440~1501)-광산김씨(1443~1513) 묘소 좌측 능선에 있다. 조명우 아들 조윤승(曺允升, 1718~1763) 처고조는 훈련대장 및 병조판서를 지낸 이완(李浣, 1602~1674)이다.
위 족보에 조명우(曺命佑, 1694~1758)를 갑자년(甲子年) 1744년(영조20) 입적했다고 돼 있다. 이는 조몽정 둘째 아들인 형조정랑 조척(曺倜, 조탁 동생, 파주시 교하읍에 후손들 세거)의 증손인 조하격(曺夏格, 1693년생, 門長)과 조탁(曺倬) 사위인 유윤창(柳允昌, 1583~1647, 교하 출생, 군수, 매제: 영의정 이경석)-창녕조씨(1583~1636.4)의 현손 만촌 유복명(晩村 柳復明, 1685~1760, 형조판서)과 조명욱(曺明勗) 사위인 경창군(慶昌君) 6세손 이게(李垍, 1707~1757, 정언·동부승지, 경창군 장남 창원군 이준·昌原君 李儁의 5세손), 그리고 조명욱 외증손인 유학 정진주(鄭鎭周)가 영조에게 상언(上言)하여 이뤄진 것이다. 중요한 사료다.
하지만 조명우(曺命佑, 아들: 曺允升·允斗) 현손(玄孫-조완승)대에 절손(絶孫)돼 몰락하여 묘소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 왜 절손됐을까. 현달한 경창군 후손(동부승지 이게 등)들과 노론 실세(實勢)인 대사헌·형조판서 유복명(柳復明)과 그 후손들의 배경이 탄탄했는데, 몰락한 이유가 불가사의하다.
위 조명우(曺命佑, 1694~1758) 장인 임각(任慤)은 풍천임씨정헌공파(貞憲公-任權)인데, 파보에 3형제 '각(慤)·당(戇)·총(總)' 생졸(生卒) 등이 없고 이름만 등재돼 있다. 양주군에서 무신혁명 핵심 인물인 풍천임씨 임서호(任瑞虎, 1678~1728)와 연루돼 3형제 모두 유배 또는 처형된 것으로 판단된다.
위 조명우 사위는 진사 이거 이귀상(頤居 李龜祥, 1725~1758)이며, 이귀상 장인은 울산부사를 지낸 정간(鄭榦, 1692~1757)이다.
위 (柳)希奮(희분, 1564~1623.4.4)은 (曺)實久(실구)의 장인인데, 병조판서로 있을 때 계해정변(인조반정)이 일어나 참형됐다. 유희분은 광해 비(妃) 유씨 오빠이며, 조세추(曺世樞) 외고조부다.
조실구 둘째부인 아버지, 즉 조실구 두번째 장인이 鄭晥(정환, 1585~1609)이다. 조실구 손위처남인 정뇌경(鄭雷卿, 1608~1639)은 정언 및 필선을 역임하고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모시다가 죽임을 당했다. 정두경이 육촌 형이 된다. 이런 연유로 정두경이 조실구 조부(조탁)와 아버지(조명욱) 묘갈명을 지었다.
또한 정환(鄭晥) 손아래동서가 용인현감 남식(南烒, 1689~1650, 남구만 조부)과 이조참판 김반(金槃, 1580~1640, 사계 김장생 아들)인데, 남식 사위가 심양에서 처형당한 삼학사(三學士) 오달제(吳疸濟, 1609~1637)다. 생원 정환(鄭晥, 1585~1609)의 증손자가 무신혁명(戊申革命,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장살된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 1665~1730, 조부: 필선 정뇌경)다.
조실구(曺實久)는 1728년 무신혁명 후 참형된 경수·경하·경강·경소 조부이며,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의 큰처남이다. 조실구 아버지는 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1572~1637)이고, 조명욱 아버지는 공조·형조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 1552~1621)인데, 이양당은 한의학서인 이양편(二養編)을 1613년(광해5)에 간행했다.
조실구가 자식을 두지 못해서 조하장(曺夏長, 1634~1661, 공청도사 조시일 삼남)을 봉사손으로 입양했지만 조하장과 그의 아들이 요절하여 조하주(曺夏疇, 1650~1725, 조시중 장남)를 봉사손으로 입적했는데, 무신혁명 때 조하주 아들(조경강 등) 및 손자(조세추 등)들이 대거 기병하여 처형됐기 때문에 조등-조한필-조언박(생부: 조계형)-조몽정-조탁-조명욱-조실구-조하장의 봉사손으로 조명우(曺命佑, 1794~1758)를 입적하게 된 것이다. 조명우(曺命佑) 묘소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68번지(23306㎡) 태현에 있는 삼척부사 조등(曺璒, 1440~1501)-광산김씨(1443~1513) 묘소 좌측 능선에 있다. 조명우 아들 조윤승(曺允升, 1718~1763) 처고조는 훈련대장 및 병조판서를 지낸 이완(李浣, 1602~1674)이다.
※1994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판한 '영조무신역옥추안 해제'에 "무신변란(戊申變亂)은 조선후기 정치·사회체제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일어난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었다. 분출된 각 계층의 저항 세력이 왕조 교체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정권 교체를 지향했던 역사적 사태였다 ."고 평가했다.
*주(註): <1> 1728년(영조4) 3월무신년 봉기 때 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이유익 임서호 정팔룡 조성좌 등 주체세력들이 기존 성리학(주자학) 중심의 이념과 신분질서를 변화시키려 했고, 지방의 수령·병사(兵使)·중군(中軍) 등을 임명했으며, ‘제역감역(除役減役)·불살읍쉬(不殺邑倅)·불살일민(不殺一民)·불탈민재(不奪民財)·물겁부인(勿怯婦人)·환곡호궤군병(還穀犒饋軍兵)’ 등 실천 강령을 채택하여 시행했기 때문에 ‘무신혁명(戊申革命)’이라고 명명했다.
이른바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1천여 번이나 나온다.
(1728년 무신혁명 대장군 휘 聖佐 8세손 曺濽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