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복경공
중훈대부 태복경공 파조 조흥 설단비 |
태복경공 조흥(曺興)충혜왕 1년(1340)~우왕 14년(1391)
창녕조씨 태복경공파는 창녕조씨 갱시更始 1세 중의 한 분인 송군松君의 6세손 흥興이 파조인데, 흥의 관직에 따라 태복경공파라 부른다. 태복경 太僕卿 [대복경 大僕卿 이라고도 표기하였으나 발음은 모두 ‘태복경’으로 하였다.] 은 고려시대 관청인 태복시 太僕寺 [‘大僕寺’ 로도 표기하였으나 발음은 둘 다 ‘태복시’ 로 하였다.]의 종3품 벼슬이다.
태복시는 고려시대, 여마輿馬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와 구목廏牧 [소나 말을 먹여 기르는 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였는데, 충렬왕 34년(1308)에 사복시 司僕寺로 고쳤고, 그 뒤 여러 번 두 명칭이 교차되며 개칭되었다.
공의 자는 여관汝寬, 호는 송암松庵이다. 지원至元 [중국 원나라 순제順帝 때의 연호임] 6년 충혜왕 1년(1340)에 태어났다.
공민왕 16년(136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공민왕 23년(1374)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우왕 5년 기미년(1379)에 풍해도豐海道 진무어사鎭撫御史가 되었다.
신돈辛旽의 일에 홀로 아첨하거나 빌붙지 않았다.
보문각寶文閣 태학사太學士로 임명되었다.
우왕 9년 계해년(1383)에 청풍군사淸風郡事가 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고려 역사의 운세가 장차 다할 것이고, 나라일이 다난함을 보고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중훈대부中訓大夫 태복경太僕卿이 되었다. 홍무洪武(중국 명나라 태조 때의 연호임) 24년, 우왕 14년 신미년(1391) 2월 14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창녕군昌寧郡 고암면高岩面 개복리介福里 율곡栗谷 진목산震木山에 있었다고 전해 오나 실전되었다. 1991년에 공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81에 있는 참의공[손자인 조명수曺命壽] 묘 위 오른쪽에 세 아들의 단비와 함께 공의 묘단비를 세우는 등 태복경공 선대 단소를 마련하였다.
부인은 연일정씨延日鄭氏인데, 부친은 교위校尉 익주益周이고, 외조부는 판관判官 안동권씨 연演이다. 지원至元 2년, 충숙왕 5년 병자丙子(1336)에 태어나, 홍무洪武 25년, 조선 태조 25년 임신년(1392) 8월 20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공의 묘 왼쪽에 있었다. 여교女敎 5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3남 1녀를 두었다.
파조 태복경 조흥과 세 아들 제단(창녕군 고암면 대합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