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22
  • 어제191
  • 최대321
  • 전체 29,312

창녕조씨태복경공파
뿌리탐구

창녕조씨유래, 시조, 태복경공, 가문을빛낸인물, 향사일정, 항렬표,....

혈손및뿌리 고찰

로고 > 뿌리탐구 > 혈손및뿌리 고찰

조정생 손자인 조하양 묘소와 대사간 박이장!

페이지 정보

孤竹先生 작성일25-03-26 14:50 조회40회 댓글0건

본문

h1.jpg

h2.jpg

h3.jpg

▲조하양(曺夏良, 조한유 조부,1629~1699) 묘소: 진양강씨와 합분이다. 위 비석 등 석물은 1990년에 설치했다. 진주목사·승지 이정작(李庭綽)이 지은 묘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후 죄다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때 인근 덕정리 비석등에 있는 장자 조심(曺淰) 묘소 묘갈(묘비)과 조부 창원부사 조정생(曺挺生) 묘갈도 파괴됐다. 무신혁명 후 묘소 관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됐음을 알 수 있다. 조하양 묘소는 경남 합천군 대양면 덕정리 산 83번지(구 향교부지, 22962m², 소유자: 창녕조도동종중-昌寧曺道東宗中)에 있다. 조하양 묘소는 고향인 합천군 묘산면 안성리로부터 25km 떨어져 있다.

h4.jpg

경남 합천군 묘산·봉산면 창녕조씨(昌寧曺氏)들이 1934년에 최초로 만든 '창녕조씨족보'인 갑술보(甲戌譜) 1권(상권) 22P다. 1606년(선조39) 병오보(丙午譜) 간행 후 328년만에 발간했다.

진사 조하양(曺夏良)은 창원부사 조정생(曺挺生)의 종손(宗孫, 손자)이다. 위 요절한 조행만(曺行萬, 1715~1742, 조하양 증손) 장인은 윤용서(尹龍瑞, 장인: 함양 지곡면 거평마을 강겸후<姜謙厚, 부: 강명세, 고조: 교리 姜繗>)이고, 처증조 윤심(尹深)은 1635년(인조13) 여름 압실 지곡사에서 조시량(曺時亮) 조시원(曺時遠) 등과 함께 유희를 즐겼던 인물이다. 문경호(文景虎, 1556~1619, 찰방) 양자 문필양(文必陽, 생부: 문경호 6촌동생 문경진)의 맏사위윤심(尹深)이다.

조행만 맏사위 권정만(權正萬, 1733~1793)은 산청 단계 출생인 유학권약(權瀹, 1560~1590, 동생: 권도·權濤)의 8세손이고, 조행만 둘째 사위인 진사 송석룡(宋錫龍, 1739~1786)은 삼가현 출생이다. 조명서(曺明恕, 1724~1790, 조성좌 11촌 조카) 사위인 유학 임주석(林柱奭, 1759~1832)은 임진부(林眞怤)의 7세(6대)손으로 삼가 대평 장단 출생이다.

조행만의 장인(윤용서)의 처조부인 함양 거평마을 생원 강명세(姜命世, 1632~1780, 부: 강문재)는 내암 정인홍의 고제(高弟)인 장령·교리 강린(姜繗, 1568~1619, 장령, 아들: 姜有徵)의 증손이다.

강명세 외조부는 거창 살목마을 생원 윤영남(尹英男, 부: 윤탕신, 외삼촌: 조응인)이고, 윤탕신(尹湯臣, 장인: 조몽길) 처남이 대구도호부사 조응인(曺應仁, 장남: 정주목사 조정립)이다. 강명세 아버지 강문재(姜文載, 장인: 최홍서)는 수우당 최영경의 손서다. 최홍서(崔弘緖)최영경 6촌동생인 최윤경(崔胤慶)의 아들인데, 최영경의 양자로 입적됐다.

강명세 손아래 동서 하응복(河應復, 1695~1764, 조부: 하홍, 종조부: 하명, 대고모부: 동계 손자 정기헌)은 진주 단목 하달도(河達道, 하명-하홍 아버지, 하응복 증조)의 증손이다. 진사 하명(河洺, 1630~1677)은 조하양(曺夏良) 종조부인 정주목사 조정립(曺挺立, 조성좌 고조) 딸(창녕조씨)의 맏사위다.

그나마, 조정생(挺生)公은 시일(時逸)→하양(夏良)→심(淰)→한좌(漢佐)→행만(行萬)→현묵(顯黙, 생부: 명서·明恕)→계철(啓喆)→봉문(鳳文)→석규(錫奎)로 종손(宗孫)이 이어짐. 합천 창녕조문의 종사 관련 일은 조명서(曺明恕, 1724~1790, 한좌·漢佐 차남) 후손들과, 조정립(挺立)公 7세(6대)손인 조효원(曺孝源, 1782~1849, 조시건 6세손)을 필두로, 그의 손자 난파 조병문(蘭坡 曺炳文, 1832~1890)-조계조(曺啓祚, 1856~1926, 조시적 7세손)-조진문(曺震文, 1847~1923, 조시건 8세손)-조명문(曺命文, 1874~1948, 조시건 8세손)-조석면(曺錫冕, 1873~1935, 조시매 9세손, 면우 곽종석 문인)이 학행(學行)으로 폐고된 가문을 보존하려고 애를 썼음.

조하양-조성좌(曺聖佐)·정좌(鼎佐) 창녕조씨 문중은 1728년(영조4) 무신혁명으로 폐고(廢錮)되고 이른바 역적 문중인데도, 산청 단계리 안동권씨 및 상주 낙동면 풍양조씨 가문 등과 혼인을 했음. 즉 조한좌(曺漢佐, 1686~1724.9)의 장자인 조행만(曺行萬, 1715~1742)의 딸(창녕조씨, 1760년졸)이 권위(權煒, 1708~1786, 진사) 아들 권정만(權正萬, 1733~1793)에게 시집을 가고, 조행만 동생인 조명서(曺明恕, 1724.2~1790)가 조지경(趙志經, 1692~1734)의 딸에게 장가를 감.

또한 조명서(曺明恕)딸(창녕조씨, 1752~1784)이 삼가현 대평의 유학 임주석(林柱奭, 1759~1832)에게 시집감. 권정만은 정언 동계 권도(東溪 權濤, 조하전<조성좌 조부> 처조부) 형님인 권약(權瀹, 장인: 함양군수 趙宗道)의 8세손이고, 조지경(趙志經)은 좌랑 조정(趙靖)의 6세손, 임주석은 임진부(林眞怤, 1586~1657) 7세손임. 또한 조한좌(曺漢佐) 6촌동생인 조한우(曺漢遇, 1697~1761, 부: 조형, 조부: 조하상, 고조: 조정생)의 둘째 사위는 진주 단목의 하해호(河海浩, 1726~1806)인데, 하해호 증조부인 하명(河洺, 1630~1677, 생원)의 처(전의이씨, 李瑑 딸, 하해호 증조모) 외조부가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1583~1660)임.

이를 보면, 권도(權濤)-조정(趙靖)-임진부(林眞怤)-하명(河洺) 가문 등 경상도 남인(南人) 사족(士族)들이 이른바 무신변란(戊申變亂, 정희량-조성좌의 난)에 대해 긍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도 있으나, 폐고(廢錮)된 조성좌 문중과 혼례가 이뤄진 것은 상대방 역시 무신혁명에 연루돼 폐고가 됐거나 폐고 수준의 타격을 받았기 때문임.

또한 합천의 조성좌(曺聖佐, 1696~1728.4.1) 가문은 영남 제일 부자였던 문경의 조세추(曺世樞, 1703~1728.4.16) 가문(호조참판 조탁-이천부사 조명욱)처럼 완전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음.

진사(進士, 1657년 효종 8년 사마시) 사징당 조하양(駟徵堂 曺夏良)公은 조시일(曺時逸, 예조좌랑)공의 장남임. 조하양 바로 밑 동생이 조하강(曺夏剛, 조숙·曺淑 아버지, 무신혁명정희량처조부)임.

조하양公 첫째 아내 연안이씨(延安 李氏, 1630~1668)의 부친은 용안현감 이박(李博, 1599~1665)이고, 조부는 목천현감 이시달(李時達), 증조는 임란 때 대둔산고개(이치)에서 순국한 익산(益山) 의병장 이보(李寶, 1544~1592.8)임. 특히 조하양(曺夏良,조성좌 조부인 조하전 6촌동생) 처증조인 이보(李寶)는 1623년 계해정변(인조반정) 때 영의정 내암 정인홍을 처형하는데 앞장선 묵재 이귀(默齋 李貴, 1557~1633)의 형님임.

이런 혈연 등으로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 때 합천의 조성좌(曺聖佐)·정좌(鼎佐)·명좌(命佐)公과 이조판서 이귀(李貴) 현손인 이하(李河,영의정 이시백 증손)가 서로 거의(擧義)에 핵심 인물로 참여하는 단초가 됐을 것임.

합천 묘산면 안성리 창녕조씨 문중이 어떤 인연으로 전라도 익산에 살고 있는 연안이씨 이보(李寶) 증손녀와 혼인을 하게 된 걸까. 이는 이시달(李時達, 1580~1630, 이보 아들)의 장인인 강진현감 소사원(蘇泗源, 1563~?) 때문임. 익산 출생인 소사원은 내암 정인홍(영의정)의 영원한 제자인 함양의 유학 고대 정경운(孤臺 鄭慶, 1556~1619?)과 친교가 있었음.

정경운은 합천 묘산의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1556~1624, 대구도호부사)公과 동갑내기 친한 친구였음. 정경운을 매개로 한 인연이 조응인 증손인 조하양(曺夏良, 1629~1699)公이 이시달의 손녀사위가 된 것임. 진사 조하양( 曺夏良)의 증조부인 조응인(曺應仁)公이 1612년(광해4) 1월~1614년 12월까지 용담현령을 할 때 이시달과 소통했을 수도 있음.

충남 서천군 출생인 권전(權佺, 1583~1651, 안동부사 권집·權諿 삼촌)-양천허씨-진주소씨(晉州蘇氏) 묘소는 충남 서천군 판교면 검덕리 검단마을에 있음. 권전(權佺) 계배(繼配)인 진주소씨 아버지 소백복(蘇百福, 여산 출생, 손아래동서: 영의정 이덕형)은 예조참판 신담(申湛, 1519~1595, 서천군 한산 출생, 신중주 6세손)의 사위임.

신담은 현감 신득자(申得滋, 1569~1637)의 13촌 아재인데, 신득자 장인이 여산(礪山, 익산) 출생인 소순복(蘇純福, 장인: 세종 6세손 여주목사 이충작)임. 4촌지간인 소순복-소백복은 진위(평택)에서 1728년(영조4) 무신혁명에 참여하여 풍비박산된 소성(蘇晟)·소면(蘇冕)·소정(蘇鼎, 41세)과 같은 문중임.

무신혁명 때 남원 출생으로 처형 및 정배된 소정(蘇檉, 41세)·소철(蘇撤)·소동철(蘇東轍) 등 진주소씨 문중과도 인척으로 판단됨. 충청도 영춘현감(永春縣監) 신득자(申得滋, 장인: 소순복)는 대사헌 신식(申湜, 청주 낭성 출생, 영의정 신숙주 7세손)의 아들인데, 신득자 현손인신천영(申天永)무신혁명 때 충청병사(忠淸兵使, 종2품)에 추대된 인물인데, 참수됨.신득자(申得滋, 매제: 김덕민 및 우의정 강석기) 동생이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을 비판한 도승지 신득연(申得淵, 1585~1647, 사위: 삼학사 오달제)임. 신득연은 광해 등극에 기여한 공로로 1614년(광해6) 10월 조응인-이대기-조정립-조정생 등과 함께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 1등(253명)에 책훈됨. 그후 귀양지 진도에서 1647년(인조25) 사망함.

권전(權佺)1728년무신혁명으로 장폐된 충청감사 권첨(權詹, 1664~1730)의 증조부이고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의 조카임.

정배죄인 권완(權浣, 1763~?, 증조: 충청감사 권첨)1728년(영조4) 무신혁명 때 능지처사된 조세추(曺世樞, 1703~1728)의 딸 조분순(曺分順)과 결혼하고, 조경회(曺景淮, 1686~1756, 조세추 삼촌) 아들 조윤국(曺允國, 1734~1796, 조세추 사촌동) 권완 누나, 즉 정배죄인 권부(權裒, 1719~1763, 조부: 권첨, 유배지 제주에서 사망) 딸과 결혼했음. 권완(權浣)무신혁명으로 장폐된 충청감사 권첨(權詹, 1664~1730)의 증손자임. 1744년(영조20) 전후에 양인(良人, 평민)으로 감형돼 정배죄인끼리 결혼 한 것임.

권전(權佺,권첨 증조) 양부 권겹(權韐, 1562~1643, 권필 형님)은 이조참판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9~1623)과 친했는데, 계해정변(1623년) 직후 참수된 유몽인은 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 1552~1621)과 친교가 있었음.

유몽인은 이양당-치재 조탁(曺倬)이 거쳐하는 당호(堂號) '치재(恥齋)'를 노래하는 '치재기(恥齋記)'를 지었음. '치재(恥齋)'는 '부끄러움을 아는 집'이라는 뜻임. 조탁(曺倬) 6세(5대)손이 1728년(영조4) 무신혁명(戊申革命, 이인좌의 난) 때 처형된 조세추(曺世樞, 1703~1728, 손서: 권완)조윤국(曺允國, 1734~1796,처증조: 권첨)임.

*블로그 '어유당 유몽인의 치재기(恥齋記)와 치재 조탁, 문재인의 무치(無恥)!' 참조:https://blog.naver.com/antlsguraud/222187505324

1728년(영조4) 무신혁명 실패로 이보·이귀·이시백 문중은 능지처사된 봉사손 이하(李河, 증조: 이시백)를 비롯한 이하 아들 이삼득(李三得, 22세)·이명귀(李命龜)·이명린(李命麟)은 교형, 처 끗영(唜永)·며느리 완이(完伊)와 둘째 며느리 서근례(西斤禮), 나이가 차지 않은 아들 다치(多致)는 모두 평안도 철산부(鐵山府)의 관노비로, 친아우 이척(李滌)은 용천부(龍川府)로 정배되고, 이하 백부 이문저(李文著, 조부: 이시백)는 능지처사되는 등 풍비박산됐음. 이조판서 이귀·영의정 이시백이 대대로 살았던 남산 밑 회현동 고택은 영조의 명에 따라, 무신혁명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된 참봉 김중만이 가져갔음. 무신혁명에 적극 참여한 조광조(趙光祖, 1482~1520, 8세손: 조문보), 이덕형(李德馨, 1561~1613, 현손: 이지인, 손위동서: 소백복), 정온(鄭蘊, 1569~1641, 현손: 정희량) 문중은 복권됐지만, 이귀·이시백(후손: 이문저-이하) 문중은 끝내 복권되지 못했음.

조하양의 둘째 장인은 강휘철(姜徽喆)임. 강휘철 조부는 합천 임북리 출생인 찰방 강익무(姜翼武)임. 강익무 형님이 사간 강익문(姜翼文)임.

특히 강익무는 이른바 '광해복위 사건'으로 합천이 또다시 아수라장이 될 때인 1631년(인조9) 9월 18일 인조에게 "정인홍(鄭仁弘)의 족당(族黨)이 잇달아 모반(謀叛)하니, 역적의 족속을 분리하여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집권 서인(西人) 편을 든 인물임.

조하양 아들(5명)사위(2명)는, (淰, 1669~1699, 처조부: 직장 조익구<동생인 청송부사 조익강·趙益剛은 조정생 세째 사위임>, 아들: 한좌·漢佐 및 한유·漢儒, 심 묘소: 대양면 덕정리 비석등-심 증조인 조정생 묘소 뒤쪽),(灝, 1671~1717, 처부: 대구 도동 출생인 진주목사 최진남, 단성현 권중도가 지은 제문 있음),(泳, 8세손 학승·學承이 1934년 갑술보 서문 씀, 처증조: 양개·梁漑), (泂, 1676~1731, 일엽청·一葉靑, 처증조: 동지중추부사 심대해), 박성주(朴聖胄, 1654~1710, 형: 조명좌의 처(강씨, 부: 강진익)의 또다른 외조부인 박세주<朴世胄, 장인: 조하양 조부(부사 曺挺生)의 6촌동생인 군수 曺挺融>, 증조: 대사간 박이장), 배성도(裵聖度, 1681~1706, 배위: 창녕조씨 1680~1752, 조부: 성산배씨 배상유, 5대조: 참판 배흥립, 무신혁명 때 처형된 배중도·裵仲度 인척?), (濱)임.

h5.jpg

▲박공구(朴羾衢, 1587~1658, 진사)는 합천 매안리 출생인 대사간 용담 박이장(龍潭 朴而章, 내암 문인)의 차남이다. 후손들이 산청 단계리에 세거하고 있다. 박성주(朴聖胄, 1654~1710, 조부: 박공구) 형님인 박세주(朴世胄, 1650년생, 박원영 장남)는 무신혁명 조명좌(曺命佐, 1700~1728.4.28)의 장인(강진익, 1678~1709, 매제: 처형된 유몽서)의 두 번째 장인이다. 또한 박세주는 울산현령 조정융(曺挺融, 조정립 육촌동생) 사위다.

h6.jpeg

▲박성주 '처(창녕조씨) 부(父) 생원 하양(夏良), 조(祖) 도사 시일(時逸), 증조 부사 정생(挺生), 외조(外祖) 현감 이박(李博)'으로 정확하게 등재돼 있다. 1713년 순천박씨 계사보(癸巳譜) 간행 때 배위는 모두 등재가 안 돼 있는 걸 보면, 1728년무신혁명 후 간행한 족보인데도 배위가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60세 쯤 사망한 창녕조씨(昌寧曺氏, 남편: 박성주, 1715년 졸) 슬하에는 자식이 없다.

h7.jpg

박세주(朴世胄, 제수씨: 조하양 ) 장인인 조정융(曺挺融)이 등재돼 있다. 순천박씨 판윤공파-의주목사공-용담공파보다.

맨위 이미지 조하양(曺夏良) 비석은 1728년(영조4) 무신혁명 후 파괴되고 1990년에 세웠음.

*즉, 합천의 봉산 묘산 쌍책 대양 등지에 산재해 있던 조성좌·명좌·정좌조한유 문중 선조들의 묘소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은 파괴돼 버렸음. 봉산면 김봉에 있던 '조한유 묘갈(이주대 撰)'도 조한유公이 1728년 무신변란 때 충심(忠心)을 보여줬는데도 1752년 사망 후 파괴됨. (안동 풍산읍 만운리의 조탁, 조명욱 묘소와 성남시 서현동 조몽정, 문경읍 갈평리 조실구 묘소도 파괴 및 훼손됨)

다만, 대구도호부사를 역임한 조성좌公의 선조인 ‘도촌 조응인’의 묘비석은 ‘동계 정온’이 지었고, 비문에 ‘정인홍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했다’는 이유 등으로 마을 어귀에 있었지만 훼손되지 않았음.

무신혁명때 박문수 등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한 조한유(曺漢儒)는 생조부로 조하양公의 손자임.

조하양 9세(8대)손이며 조영(曺泳) 8세손인 조학승(曺學承, 1868~1944, 묘산면 안성리 출생)이 1934년 갑술년에 서문을 쓴 창녕조씨족보 상하 두 권을 간행함.

*이 족보(갑술보)에는 1728년(영조4) 무신혁명 때 '자신의 말다리를 내려 쳤다'고 알려진 조한유(曺漢儒)公은 무후(無後)로 돼 있음.

현재 경남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소재 조성좌(曺聖佐)公 선조의 무덤과 관련한 '석가산의 쇠갓'의 전설이, 상기 조하양公의 무덤과 연계하여 대양면에서도 회자되고 있음. 1728년 무신혁명(이인좌의 난)이 이 지역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가듬해 볼 수 있는 사례임.

<석가산의 쇠갓>

1995년 12월 합천문화원에서 발간한 합천군사(郡史) 1446쪽에는 '석가산의 쇠갓'이라는 전설(傳說)이 수록돼 있다.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에 우뚝 솟은 봉우리에 있는 큰 무덤(註: 조성좌종조부인 조하현·曺夏賢 무덤)을 하관할 때 일류 풍수가 쇠갓을 쓴 사람이 지나갈 때 하관하라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하관을 하고 말았는데 그 순간 (약 3.5km 떨어진 상현리 1구) 부자정(父子亭) 모퉁이에 흰 옷을 입은 부녀자가 솥뚜껑을 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후 남아가 태어났는데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있었으며 눈동자가 크고 총명하여 덕망을 사방에 떨치는 큰 인물이 되었다. 그가 조성좌(曺聖佐)이며 조정(朝廷)에서 정변(주:무신혁명)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지방민을 동원하여 의병을 일으켜 올바른 조정(朝廷)을 만들고자 했다. 한양의 포도대장(주: 남태징)으로부터 일일 팔십리씩 팔일 만에 도착하면 성문을 활짝 열어 주기로 한 연락을 잘못 전달받아 팔일에 팔십리씩 진격함에 따라 결국 조정에서 알게 되어 관군(官軍)이 동원되고 치열한 전투 끝에 패하고 말았다. 한편 조성좌의 참모로 크게 활약하다 체포직전 각종 서류를 불태우고 혓바닥을 끊어 항거한 봉산면 권빈리 3구 손후빈(孫後彬)은 참수되어 애마의 등에 실려 돌아와 말(馬)이 슬프게 울기에 가보니 주인의 수급(首級, 머리)을 싣고 왔다.”

이 전설에서 민중(백성)의 희망과 한(恨)과, 그리고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조성좌(曺聖佐, 1696~1728.4.1) 선조와 연관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28년 무신혁명 조성좌공 묘소는 석가산(230-2번지)에 있다. 후손들은 삼가면 일부리 799-1, 795번지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h8.jpg

▲부자정(父子亭)이다. 1986년 합천댐으로 수몰되기 전 봉산면 상현 1구 290-1번지 부자정마을에 있었다. 화순최씨문중 소유였다.

h9.jpg

▲소화(昭和) 3년 1928년 발간한 창녕조씨족보(총28권)다. 추(秋) 권(券)이다

태복경공파 등 창녕조씨 27개 문중이 등재돼 있다. 충북 괴산 연풍면 주진리(조병수)에서 편집 및 발행했다. 합천 묘산면 사리에서 조한유(曺漢儒, 조정생 현손)의 후손이 입적돼 있는데, 1934년 갑술보(甲戌譜)에는 무후(無後)로 조한유 후손이 등재가 안 돼 있다.

그러나 1928년 간행한 위 족보에는 조한유 손자 정묵(正默)밑으로 계린(啓鱗)이 입적(入籍)돼 있는데, 생졸(生卒)조차 맞지 않다.

한유(漢儒, 1696~1752, 생부: 심·淰)명윤(明玧, 1715~1784)·明學(명학, 양부; 한우)정묵(正默, 1747~1765)정체불명의 계린(啓鱗, 1789~1816, 묘소: 묘산면 산제리)응문(應文,1859~1886, 묘소: 묘산면 봉곡리(새골))석운(錫雲, 1873~1921)태승(泰承, 1895~1937)상연(相淵, 1919~2008, 현손: 조기종)으로 돼 있다.

1934년갑술보에는 묘산면 안성리 창원부사 조정생(曺挺生)의 장남인 시일(時逸)→하양(夏良)→심(淰)→한좌(漢佐)→행만(行萬)·명서(明恕)→현묵(顯黙)·윤원(允源)으로 이어지는 종손(宗孫)이 자세하게 등재돼 있다.

그러나 위 1928년족보조정생(曺挺生) 후손들은 등재돼 있지 않다. 정주목사 조정립(曺挺立) 후손(계배 경주김씨-삼배 파평윤씨)들은 위 족보에 등재돼 있는 것과 대비된다. 심지어 행만(行萬) 사위들 이름은 있지만, 행만(行萬) 아들 현묵(顯黙)과 명서(明恕) 아들 윤원(允源)은 빠져 있다.

또한 성좌(聖佐) 동생으로 정좌(鼎佐)가 왜곡·등재(정좌석좌 동생, 조숙 차자임)돼 있다. 1934년갑술보에 입적한 덕좌(德佐, 성좌 동생)는 위 1928년 족보에는 없다. 이상한 족보를 1928년에 간행한 것이다.

이처럼 조정립 후손들은 위 족보에 등재가 돼 있는데, 조정생 후손들이 모두 빠진 것은 1928년 족보 편찬 과정에 조한유 밑으로 입적하려고 한 사람 등등의 진손(眞孫) 여부 등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h10.jpg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등 27개 조씨(曺氏) 문중이 참여했다. 합천군 묘산면 안성리 창원부사 도계 조정생(陶溪 曺挺生, 1585~1645)의 종손(宗孫)을 비롯한 후손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진손(眞孫)이라는 근거도 없는 사람들을 등재하려고 했기 때문에 조정생(曺挺生) 후손들은 위 족보 간행을 거부한 것이다.

6년 후 1934년 묘산면 안성리 조정생 후손들이 주간하여 창녕조씨족보(갑술보)를 328년만에 편찬하게 된다. 이 갑술보에는 인근 봉산면 김봉-행정-압실에 세거하고 있는 조정립(曺挺立) 후손(계배 경주김씨-삼배 파평윤씨)들은 모두 빠졌다. 갑술보에는 조한유 후손들 역시 등재가 안 됐다.

그러나 다만 묘산면 도옥리 서재골에 살고 있는 불분명한 사람들이 조덕좌(曺德佐조정립 현손, 조시량 증손) 후손으로 입적되고, 묘산면 평촌리 조명좌(曺命佐조정립 현손, 조시량 증손)후손들은 등재가 됐다. 조정립 후손들 중 장자 조시량(曺時亮, 양산군수) 후손들만 갑술보에 들어가 있다.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1728년 무신혁명 대장군 휘 聖佐 8세손 曺濽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