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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태복경공파
뿌리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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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좌승지 조몽길 묘갈명: 손자 조정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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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4-06-05 07:59 조회133회 댓글0건

본문

왕고증좌승지겸경연참찬관부군묘갈명(王考贈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墓碣銘)이다. 즉 유학 조몽길(曺夢吉, 1521~1561)묘갈명이다. 나 찬용의 13대(14세) 조부다.


1614년(광해6) 11월 내린 조몽길 상주목사 등 추증 교지(80cm×55cm)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尊經閣)에서 소장하고 있다. 아들
용담현령 조응인(曹應仁)공이 1614년 10월 11일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 1등에 책록됐기 때문에 상주목사 등으로 추증된 것이다.

정운원종공신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오르게 하는데 공을 세운 750여 명에게 광해가 내렸다. 영창대군 이의(李㼁)가 1614년 2월 강화에서 죽임을 당한지 8개월이 지나고 책록됐다.

최초로 공개하는 조몽길(曺夢吉) 교지정운원종공신록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등 남명학파 가문이 얼마나 깊게 영의정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과 연결돼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정인홍과 절교했다. 등등" 후대의 기록은 조작됐음을 이 교지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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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 무신혁명 후 내가 최초로 공개하는 조몽길(曺夢吉, 1521~1561) 할배 상주목사-좌승지 추증 교지다. 만력 42년 1614년(광해6) 11월 광해가 내렸다(승전·承傳). 가로세로 80cmx 55cm다. 무신혁명 후 아수라가돼 외부로 유출됐을 것이다.

지금, 투탁된 가짜 고령 다산면 송곡이 합천 창녕 조문(曺門)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때에 내 13대 선조상주목사-좌승지 추증 교지를 올린다. 감회가 새롭다. (마침내 2022년 7월에야 창녕조씨태복경공파 문중에서 송곡 등등 가손(假孫)들퇴출시켰다.)

"敎旨 贈 通訓大夫 尙州牧使 曹夢吉 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者 萬曆 四十二年 十一月 日 通訓大夫 行 龍潭縣令曹應仁定運原從功臣 一等承傳追贈(교지 증 통훈대부 상주목사 조몽길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자 만력 사십이년 십일월 일 통훈대부 행 용담현령조응인정운원종공신 일등 승전추증)" <이미지 출처: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

※아들인 대구도호부사 조응인(曺應仁) 교지(敎旨)는 무신혁명 조성좌(曺聖佐)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삼가(三嘉) 종손(宗孫, 조병용)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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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42년 1614년(광해6) 10월 11일 내린 정운원종공신록권(定運原從功臣錄券)이다. 縣令 曹應仁(현령 조응인)이 보인다. 조응인은 당시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재직했다.

大司諫宋錫慶觀察使柳慶宗領中樞府事李恒福靑城府院君沈喜壽德平府院君奇自獻海川君崔有源嵩陽府院君金履元行大司憲尹孝全知敦寧府事閔馨男行府使李士慶察訪鄭逵生員崔明獻進士崔濩生員李升亨學生李光淑學生權憬學生朴重振權知學諭李瀷學生盧仁瑾郡守李大期府使金應成縣令曺應仁生員尹英男參奉鄭昌緖察訪姜繗生員成效奎生員禹悙生員朴文楧生員朴孝先正言曺挺立進士鄭

만력(萬曆) 42년 1614년(광해6) 10월 11일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으로 책록된 사람들이다.

정원군 이부(定遠君 李琈, 인조 아버지),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 선조 9남, 조명욱 맏사위), 관찰사 이경전, 전 장령 정조, 부응교 한찬남, 영중추부사 이항복, 청성부원군 심희수, 덕평부원군 기자헌, 대사헌 윤효전, 합천의 (용담)현령 조응인·정언 조정립·학생 조정생·찰방 하혼 및 찰방 문경호와 생원 허종선(許從善)·정인함(鄭仁涵, 내암 4촌동생)·진사 정인준(鄭仁濬, 내암 6촌동생), 삼가의 현풍현감 권양·예안현감 조차석(曺次石, 조식 장남)·진사 이간(李衎)·진사 이봉일(李奉一, 이흘 차남)·현감 박사제(朴思齊, 1555~1623?, 1623.7월 인조 1년 울산부사에서 파직됨), 초계의 군수 이대기, 진주의 진사(進士) 하협(河悏)·학생 하선(河愃)·진사 정제생(鄭悌生), 의령 학생 정렴(鄭臁)·진사 이종욱(李宗郁), 함양 찰방 강린(姜繗, 한강 맏사위), 산청 생원 박문영, 상주 낙동의 군수 조정(趙靖)·상주 매호의 찰방 조우인(曺友仁, 조응인 4촌동생), 거창 생원 형효갑·생원 윤영남, 문창부원군 유희분, 보덕(輔德, 종3품) 조명욱(曺明勗, 조응인 11촌조카) 등은 1등으로, 봉래부원군 정창연(2등), 삼가 참의 윤선(2등), 상주 부사 정경세(鄭經世, 2등), 합천 장령 강익문(2등), 창녕 생원 성이도(2등, 곽재우 사위), 하빈현의 현감 이종문(李宗文, 2등),남양주의 집의 정호선(丁好善, 2등, 정약용 7대조), 합천 설서 강대진(姜大進, 강대수, 3등)·학생 조정영(曺挺英, 3등, 조응인 조카), 삼가 생원 박건갑(3등), 첨지(정3품) 허균(許筠, 3등), 사노(寺奴) 최응룡(崔應龍, 4등) 등은 2~4등급으로 750여명이 책록됐다.

조몽길 손자인 전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1583~1660)이 1633년(인조11) 복권된 후 1635년 1월 경에 '조몽길 묘갈명'을 지었다. 조몽길 아들인 '대구도호부사 조응인 묘갈'을 세울 때 함께 묘비(묘갈)를 세운 것 같다.

조몽길 장인은 밀양 부북 후사포리 출생인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1499~1562)인데, 송계 배위 홍양이씨(洪陽李氏, 합천 묘산면 관기리 출생) 사이에서 2남 1녀가 태어났다. 막내 딸(1522~1580)이 조몽길(상주 사벌 매호리 출생)에게 시집왔다.

밀양 부북면 신송계 아내 홍양이씨(홍주이씨)가 상속 받은 땅이 합천 묘산면 일원에 많이 있었다. 그 땅 관리를 사위 조몽길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상주 사벌면 매호에 살고 있던 조몽길이 합천 묘산면으로 이주하여, 합천 입향조가 됐다.

유학 조몽길→대구도호부사 조응인→정주목사 조정립-창원도호부사 조정생→양산군수 조시량-예조좌랑 조시일→조시량 아들 유학 조하전·조하현→조하전 아들 유학 조항(曺沆)→1728년(영조4) 무신혁명(戊申革命)<1>조성좌(曺聖佐)·조덕좌(曺德佐)로 이어졌다.

*주: <1> 1728년(영조4) 3월 무신년 봉기 때 이인좌 정희량 조성좌 등 주체세력들이 기존 성리학(주자학) 중심의 이념과 신분질서를 변화시키려 했고, 지방의 수령·병사(兵使)·중군(中軍) 등을 임명했으며, ‘제역감역(除役減役)·불살읍쉬(不殺邑倅)·불살일민(不殺一民)·불탈민재(不奪民財)·물겁부인(勿怯婦人)·환곡호궤군병(還穀犒饋軍兵)’ 등 실천 강령을 채택하여 시행했기 때문에 ‘무신혁명(戊申革命)’이라고 명명했다. 이른바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1천여 번이나 나온다.

또한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 국사편찬위원회, 1994년 발간)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728년(영조4) 일어난 무신년 변란은 조선후기 정치·사회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모순으로 인해 일어난 의리명분 논쟁의 한 양상이면서 동시에 대규모적인 권력투쟁의 표출이기도 했다. 분출된 각 계층의 저항 세력이 왕조 교체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정권 교체를 지향했다. 아무튼 무신란(戊申亂)은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었다."

□ 왕고 증 좌승지겸 경연참찬관 부군묘갈명(王考贈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墓碣銘)

손자인 (전)헌납 조정립이 1633년(인조11) 복권된 후 1635년 1월 경에 지었다.

우리 종족은 그 계통이 창산(昌山, 주: 창녕)에서 나왔다. 또한 그 출중한 것을 말한다면 고려조에 있어서 대를 이어 평장사(平章事)를 한 분이 여덟이나 되었고, 그 뒤에 잇달아 창성하여 대대로 각각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순(珣)에 이르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우리 조고(祖考)의 증왕부이시다. 참판이 휘 계형을 낳으니 호조참판을 지냈고, 참판이 휘 언홍을 낳으니 교위를 지냈고, 이 분이 공을 낳으시니, 공은 휘가 몽길(夢吉)이요, 자가 상경(商卿)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주: 조몽길이 상주목사를 역임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음). 신사(1521)년 6월 26일에 태어나 신유(1561)년 12월 27일에 작고하였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갔으니, 세상에서 송계선생이라 부른 계성의 딸이고, 장절공 숭겸의 후손인데, 가훈을 준수하여 부도(婦道)와 모의(母儀)를 가졌다. 임오(1522)년 6월 28일에 태어나 경진(1580)년 11월 13일에 작고하였다.

(조몽길-홍주이씨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제 1녀는 참봉 김담수에게 시집가서 5남 2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은 정룡인데 문과에 올라 군수를 하고, 둘째는 정헌(廷獻), 셋째는 정직(廷稷), 넷째는 정계(廷契), 다섯째는 정견인데 생원을 하였다. 맏딸은 봉사 성발(成撥)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사인 홍유승(洪裕承)에게 시집갔다.

제 2녀는 승지에 추증된 윤탕신에게 시집가서 4남 3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은 기남, 둘째는 서남, 셋째는 신남, 넷째는 영남인데 생원을 하였다. 맏딸은 충의(忠義) 이의식(李義植)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충의(忠義) 이율(李嵂)에게 시집가고, 셋째는 사인 이정(李侹)에게 시집갔다.

제 3녀는 현감 박정완에게 시집가서 1남 2녀를 낳았으니, 딸은 전한 오여은(吳汝穩)에게 시집가고, 아들은 광선(光先)인데 장령을 하였다.

*주: 오여은(吳汝檼, 1561~1633, 정인홍 손자인 정릉 장인)은 계해정변 직후 함경도 경원으로 위리안치되고, 1633년(인조11) 8월 사망함.

오여은 처남인 박광선은 1631년(인조9) 2월 이른바 광해군복위사건 때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됨.

제 4녀는 봉사 이득남(李得男)에게 시집가서 4녀 2남을 낳았으니 맏딸은 사간 강익문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생원 곽이신에게 시집가고, 셋째는 부장(部將) 김천호에게 시집가고, 넷째는 사인 김성(金晟)에게 시집갔으며, 맏아들은 종경(宗敬)이고, 둘째 종례(宗禮)다.

제 5녀는 사인 문홍도에게 시집갔으며, (막내) 아들은 ()이다.

*주: 문홍도 장자 신(賮)이 아버지 문홍도가 1603년 사망 후, 아버지 첩과 1610년 간통하자 동생 지(贄)가 고발했으나, 지(贄)가 도리어 무고죄로 1611년 처형됨. 그후 간통이 사실로 밝혀져 1612년 신(賮)도 처형됨. 그래서 장자은 빼버림.

(조몽길) 맏아들 명인은 평양(주: 파평) 윤해(尹瀣)의 딸에게 장가 갔는데, 일찍 작고하여 후사가 없으므로 (동생 조응인 차자인) 정생을 후사로 삼았다.

둘째 아들 응인은 부사(府使, 주: 대구도호부사)를 하고, 승지(承旨) 전의 이득분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으니, 맏아들 정립은 헌납을 하고, 둘째 아들 정생은 정언을 하고, 셋째 아들 정영은 선전관을 하였다. 맏딸은 감찰 윤시남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사과(司果) 윤정벽에게 시집갔다.

아! 소자가 늦게 태어나서 그 음성과 모습은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가 없거니와 의덕(懿德)과 숙행(淑行)은 오히려 귀에 들은 것이 있다. 가정에서 효도와 우애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고,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접하되 시종여일하였으니, 대개 그 성품을 천연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작고하신 날 이웃 마을들이 애도하기를 마치 친척이 작고한 것처럼 하였고, 고을의 기로(耆老)들은 아직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쇠하지 않고 있다. 아! 이런 덕을 가지였으되,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또 수를 길이 누리시지 못하였으니, 과연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인가.

오늘날에 와서 내외손이 출중하여 그 난옥(蘭玉)과 잠신(簪紳)의 번성함이 세상에서 짝할 집이 드무니, 과연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 하늘은 기필할 수 있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로다. 엄명(嚴命)을 받들어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한다.

집에 동평(東平)의 즐긴 것을 쌓으니, 그 뒤에 왕씨(王氏)의 복이 창대하도다. 도산(道山) 동강(東岡) 천고의 집에 풍성한 조각돌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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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조몽길묘소: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경연참찬관 조몽길지묘, 숙부인 평산신씨지묘', 경남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산100-1 번지, 평산신씨(신계성 딸)와 상하분이다. 손자인 (전)헌납 조정립이 1633년(인조11) 복권된 후 1635년 경에 조부 조몽길 묘갈명을 지었다. 1728년 무신혁명 전까지 합천군 대양면 덕정리 못골 산 80-1번지 비석등에 있었던 동생인 창원부사 조정생 비석(묘갈)의 묘갈명도 형인 정주목사 조정립이 지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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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좌승지 조몽길 묘소: 경남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산100-1, 평산신씨(신계성 외동딸, 1522~1580)와 상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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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몽길 묘소에서 바라본 앞산: 조몽길 아들 명인-응인 묘소(상하분)가 보인다.



*블로그 '대구도호부사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연보' 참조: https://blog.naver.com/antlsguraud/220901104331

王考贈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墓碣銘: 孫子 曺挺立 撰

吾宗神秀系出昌山亦言其標揭在麗朝聯代平章者八其後延延繼昌代各有人至諱珣贈史曹參判實我祖考之會王父也參判生講繼衡戶曹參判參判生諱彦弘校尉是生公公夢吉字商卿贈左承旨生於辛巳六月二十六日卒於辛西十二月二十七日娶平山申氏旨生於辛已世號松溪先生徵士季誠之女壯節公崇謙之後遵家訓有婦道母儀生於壬午六月二十八日卒於庚辰十一月十三日生二子五女長女六月二十適參奉金聘壽生五子二女長子廷龍文科郡守次廷獻廷稷廷契廷堅生員長女適奉事成撥次適士人洪裕承第二女適贈丞旨尹湯臣生四子三女長子起男次瑞男信男英男生員長女適忠義義植次適忠義李崔次適士人李促第三女適縣監朴廷琬生一子一女適典翰吳汝穩光先掌令第四女適奉事李得男生四女二子長女適司諫姜翼文次適生員郭履信次適部將金天灝次適士人金晟長子宗敬次宗禮第五女適舍人文弘道生一子長子命仁娶平壤尹瀣之女早世無后以挺生爲嗣次應仁府使娶丞旨全義李得養之女生三子二女長子挺立獻納次挺生正言次挺英宣傳官長女適監察尹時男次適司果尹正辟鳴呼小子之生也後聲效儀形無以想像其彷佛而懿德淑行尚有得於口耳者 孝友于家無間言仁慈接物一始終蓋其性於天者然也卒之日鄰里爲之哀悼如親戚焉鄉之者老尚吃吃不衰吁有是德而不顯於世又于壽果可謂天耶式至于今家有承宅有相蘭玉簪紳之盛世罕與拜則果不可謂天耶噫天之可必也必矣承嚴命而謹爲之銘日積于家東平之樂大其後王氏之福道山東岡千古宅樹之風聲一片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