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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태복경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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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태복경공 '조흥' 등 고려 문생진사시 동년록과 조상림-조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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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4-06-04 08:54 조회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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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태복공파(昌寧曺氏太僕卿公派)의 연혁이다.

고려 때 '말과 목장일을 관장'하는 기관인 종3품 태복시(太僕寺)경(卿)을 역임한 조흥(曺興)공의 후손들이 '창녕조씨태복경공파(昌寧曺氏太僕卿公派)'다. 조흥 할배는 '상림(上林), 중림(仲林), 계림(桂林)' 세 아들을 뒀다.

계림공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조씨(曺氏)들은 진해 웅동에 많이 세거하고 있다. 1990년에 창녕조씨태복경파에 들어왔는데, 무려 500년이 지나 조계림공 후손으로 전격(?) 입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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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림(曺上林, 1361~1421) 선조의 묘소로 추정되는 연꽃 무늬 둘레석이다. 창녕군 대합면 장기리 산 38-2번지(12834㎡)에 있다. '해주오씨 전서공파(공조전서·工曹典書 오광정) 갑곡문중 무솔소문중회' 명의로 등기돼 있다. '무솔'은 대합면 등지리 무솔마을을 일컫는다. 1728년(영조4) 무신혁명(戊申革命, 조성좌의 난) 실패 후 영조가 병조판서 겸 도순무사였던 해주오씨오명항(吳命恒, 1673~1728.9)에게 조성좌·정좌·세추로부터 적몰한 재산(산 38-2)을 하사하고, 그 뒤 오명항 문중에서 무솔소문중으로 소유권을 넘겨 준 것으로 판단된다. 조상림(曺上林) 묘갈명은 1618년(광해10) 조상림 7세손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 1552~1621)이 지었고, 8세손 한림(봉교) 조정생(曺挺生, 1585~1645)이 썼는데,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 실패 후 묘갈은 파괴돼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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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4) 무신봉기로 파괴됐던 조상림(曺上林) 선조의 묘소로 추정되는 연꽃 무늬 둘레석이다. 창녕군 대합면(옛 개복면) 장기리 산 38-2번지이다. 여기서 고암면 간상리 산 111번지 딱밭골 태복경 흥(太僕卿 興) 및 아들인 상림(上林, 1361~1421)-중림(仲林)-계림(桂林)공 제단까지는 8km 떨어져 있다. 7km 거리인 대합면 신당리 산 73-1번지에는 고려 문하시중 조민수(曺敏修, ?~1390 ) 묘소가 있다.

상림(上林)공 묘갈명은 1618년(광해10) 상림공 7세손 공조참판 이양당 탁(二養堂 倬)이 지었고, 8세손 한림(봉교) 정생(挺生)이 썼다. 휘 상림(上林)공은 내(찬용) 18대(19세) 선조다.

상림(上林)공 묘갈과 묘갈명은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 조성좌의 난) 때 후손들(조성좌, 조세추 등)이 주도세력으로 참여하여 세상을 바꾸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파괴돼 전해지지 않는다.

상림공 묘소는 '창녕군 개복리(介福里) 율곡(栗谷) 진목산(震木山) 묘좌(卯坐)', 즉 '창녕군 대합면(옛 개복면) 장기리 산 38-2번지 묘좌'에 있었는데, 무신혁명 실패로 비석과 묘소는 실전됐다. 그런데 위 사진 창녕군 대합면(옛 개복면) 장기리 산 38-2번지 묘소가 상림공 묘소가 틀림없는 것 같다.

1991년 11월 27일 상림공 제단을 장기리 산 38-2번지에서 8km 떨어진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산 111번지 딱밭골에 세웠다. (아래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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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현 서울시장인 한성부(漢城府) 윤(尹)을 역임한 曺仲林(조중림) [문과] 태조(太祖) 5년(13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3위(33/33) 급제 방목이다. 출처: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중림(曺仲林) 부(父)는 興(흥), 祖(조)는 旱雨(한우), 曾(증) 寔(식), 外祖(외조) 朴益周(박익주)로 등재돼 있다. 좌측에 개국공신인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정1품) 조준(趙浚, 1346(충목왕2)~1405(태종5))과 판삼사(判三司, 종1품) 정도전(鄭道傳)이 보인다. 정도전이 당시 고시관(考試官)이었다. 위 윤발(尹彂, 尹發)은 파평윤씨 문정공파조인 윤인첨(尹鱗瞻)의 9세손이다.

중림(仲林)공은 조선 1396년(태조5) 식년시에 합격한 후, 경창부소윤(慶昌府少尹)과 1422년(세종4) 내섬시소윤(정4품), 그후 서울시장인 한성부윤(漢城府尹, 종2품)을 역임했는데, 창녕조씨족보에 중림(仲林)의 아들 등 후손이 아예 등재돼 있지 않다. 중림(仲林) 아들이 1456년(세조2)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돼 죽임을 당해 멸문(滅門)한 게 아닐까.

※조선 초기~후기 때와 달리, 고종 재위 1864년~1907년까지 43년 동안 임명한 한성부윤(서울시장) 429명이었다. 평균 재직 기간이 46일이었다. 매관매직으로 조선이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혹여 향후 뜬금없이 조중림 후손이라고 하면서 태복경공파보에 전격 입적하는 황당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조계림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며 입적한 사람들처럼.

내가 조중림 후손들이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돼 죽임을 당하는 등 큰 화(禍)을 입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좌의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장남인 지중추원사(종2품) 최숙손(崔淑孫)이 단종복위사건 때 동생인 상호군(上護軍) 최경손(崔敬孫) 및 호군(護軍) 최영손(崔泳孫)과 함께 처형됐는데, 최숙손(崔淑孫)의 배위가 창녕조씨(昌寧曺氏)이기 때문이다. 최윤덕조중림은 동시대에 벼슬살이를 했다.

조중림은 1422년(세종4) 4월에 내섬시소윤(內贍寺少尹, 정4품)을, 최윤덕은 공조판서(정2품)를, 조중림은 1434년(세종16) 7월에는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최윤덕은 우의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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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최씨족보다. 최윤덕(崔潤德)-최숙손(崔淑孫)창녕조씨(昌寧曺氏)가 등재돼 있다. 위 창녕조씨(昌寧曺氏)가 1422년(세종4) 내섬시 소윤(정4품) 및 한성판윤 조중림(曺仲林)손녀가 아닐까. 좌의정 최윤덕(1376~1445)과 한성부윤(종2품) 조중림은 동시대에 벼슬살이를 했다. 조중림은 1396년(태종5)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는데, 조중림은 얼추 1370년 쯤 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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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복경 흥(太僕卿 興) 및 아들인 (좌측부터) 계림(桂林)-상림(上林)-중림(仲林)공 제단이다.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산 111번지(29355㎡) 딱밭골에 있다. 1994년 11월 특별조치법으로 보존등기했다. 1728년(영조4년) 무신혁명 실패로 묘소가 실전되고 묘비석은 파괴돼, 1991년 11월에 설단(設壇)했다. 1728년(영조4) 무신혁명 후 파괴됐던 조상림(曺上林)묘소로 추정되는 창녕군 대합면(옛 개복면) 장기리 산 38-2번지는 8km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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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命原從功臣 上護軍 昌寧曺公 上林 祭壇(좌명원종공신 상호군 창녕조공 상림 제단)이다. 조상림(1361~1421.10.16)배위는 밀성박씨(密城朴氏, 1362~1426.1.18)다.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산 111번지(창녕조씨묘덕제종중-간상리 84-1 조우석, '모덕재'의 오기) 딱밭골에 있다. 1994년 11월 특별조치법으로 보존등기했다.

1991년 11월 설단(設壇)했다. 1728년(영조4) 무신혁명 실패로 실전됐기 때문에 부득이 설단을 했다. 조상림(曺上林)공은 1401년(태종1)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功)으로 좌명원종공신에 책록됐다(1411년 태종 11년 83명 책록, 그러나 조상림 이름 없음). 그후 오위(五衛)의 정3품 무직(武職)인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1728년 무신혁명 후 당초 조상림(曺上林)공 묘갈(묘비)은 파괴됐는데, 묘갈 글은 1618년(광해10) 조상림7세손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이 지었고, 8세손 한림(봉교) 조정생(曺挺生)이 썼었다.

맨위에 보인는 비석은 조상림(曺上林)공 아버지 태복경 조흥(太僕卿 曺興) 비석이다. 묘비 앞면에 '中訓大夫 太僕卿 昌寧曺公 諱 興 設壇(중훈대부 태복경 창녕조공 휘 흥 설단)으로 새겼다. 조상림공 양쪽에 조계림(曺桂林), 조중림(曺仲林) 비석이 있다. 조중림(曺仲林)공은 1396년(태조5) 진사에 합격하여 서울시장인 한성부윤(尹, 종2품) 등을 역임했다. 조중림의 후손은 실전돼 알 수가 없다.

[또 혹여 향후 뜬금없이 조중림 후손이라고 하면서 태복경공파보에 입적하는 황당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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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림(曺上林)공 장남 조명수(曺命壽, 1395~1475.2.4, 진사)-진주유씨(晉州柳氏, 1398~1468.9.3) 묘소다.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산 111번지(29355㎡) 딱밭골에 있다. 조명수공 아내인 진주유씨 조부는 1382년(고려 우왕8)에 밀직사(密直使)를 지내다가 합천 묘산면 관기리 중촌으로 들어온 유번(柳藩)이다. 진주유씨 아버지 김포군수 유인몽(柳仁夢, 유번 삼자)과 아들 유형(柳亨, 처당숙 좌의정 신개)의 후손들은 진주유씨대사성공파보에 무후로 돼 있다. 1728년 무신혁명 가담으로 풍비박산 됐기 때문이다. 문희공 신개(文僖公 申槩, 1374~1446, 진주유씨 오촌당숙)는 조성좌(曺聖佐, 1696~1728.4.1) 매제인 신자악(申自岳, 1707~1749)의 11대(12세)선조다. 유인몽 큰형이 군수를 지낸 유백통(柳伯通, 1361~1439)이다.

1728년 무신혁명 후 파괴된 당초 조명수공 묘갈(묘비)의 글은 1618년(광해10) 조상림7세손 공조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이 지었고, 8세손 한림(봉교) 조정생(曺挺生)이 썼었다. 조명수 장남 조순(曺珣, 1421~1482.9.22)공은 처가(妻家)가 있는 상주(尙州) 이안면 및 사벌면-공검면으로 이주했다. '세종실록(1418~1450)-지리지-상주목 용궁현' 편에 진해 거주 조씨(曺氏)들이 상주목 용궁현으로 이주한 기록이 있다. 용궁현(龍宮縣)은 현 상주시 공검면, 예천군 풍양면-용궁면 일원, 문경시 산양면 일원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조순(曺珣)공이 당시 창녕 고암이 아닌80키로 떨어진 진해 웅천에 거주하다가 상주로 이주한 것은 아닐까.

※간상리 81번지 묘소 재실(모덕재) 수리비로 삼가 조문(三嘉 曺門)에서 1999년 11월 1일 1백만원을 지원했다(조경도 종회장에게 전달함). 1995년 3월 소유권 보존한 고암면 간상리 81 및 126(田 1015㎡), 대암리 94 및 98 소유권은 2011년 및 2018년 3인(曺씨) 명의로 이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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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림(曺上林)공 장남 조명수(曺命壽, 1395~1475.2.4, 진사)-진주유씨(晉州柳氏, 1398~1468.9.3) 묘소다.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산 111번지(29355㎡) 딱밭골에 있다. 조명수공 아내인 진주유씨 조부는 1382년(고려 우왕8)에 밀직사(密直使)를 지내다가 합천 묘산면 관기리 중촌으로 들어온 유번(柳藩)이다. 진주유씨 아버지 김포군수 유인몽(柳仁夢, 유번 삼자)과 아들 유형(柳亨, 처당숙좌의정신개)의 후손들은 진주유씨대사성공파보에 무후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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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태복경 흥(太僕卿 興) 및 아들인 계림(桂林)-상림(上林)-중림(仲林)공 제단, 조상림(曺上林)공 장남 명수(命壽, 1395~1475.2.4, 진사)-진주유씨(晉州柳氏, 1398~1468.9.3) 묘소가 있다. 좌측에 재실인 모덕재(慕德齋)가 있다. 위쪽 골작이 딱밭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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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동년록은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320호로, 정희량의 본가(本家, 1738년 입적된 초계정씨)인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의 정온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고려말인 선광7년 정사년(1377년 우왕3) 3월 국자감(國子監)에서 시행한 진사 급제자 명부다. 1728년 무신혁명 정희량의 선조인 鄭悛(정전, 1356~1435)은 1등으로 합격했다. 이때 1등 4인, 2등 10인, 3등 28인이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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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 고려 우왕 3년 3월 '선광 칠년 정사 문생진사시 방목(宣光 七年 丁巳 門生進士試 榜目)'이다. 조성좌(曺聖佐, 1696~1728)공의 창녕조씨태복경공파(昌寧曺氏太僕卿公派)의 파조(派祖)인 (흥) 할배가 1377년에 종6품인 通禮門(통례문) 祗候(지후)에 재직하고 있었으며, 의 아들인 桂林(계림)공은 진사과 3등에 합격했다. 3등에 28인이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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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 고려 우왕 3년 3월 '선광 칠년 정사 문생진사시 방목(宣光 七年 丁巳 門生進士試 榜目)'이다.

 1728년 무신혁명(영조4)<1> 조성좌(曺聖佐, 1696~1728)공의 직계 선조인 조림(曺林, 1361~1421)공의 형(?)인曺桂林(조계림)공과, 辛候(신후)·卞雍(변옹) 등은 3등으로, 무신혁명 정희량의 선조인 鄭悛(정전, 1356~1435)은 1등으로 합격했다.

나(조찬용)는 태복경공 조흥(曺興) 20세손, 조상림공의 19세손이다. 진해 웅천(熊川, 웅동) 출생인 조국(曺國) 민정수석은 조흥(曺興)26세(25대)손이며, 조계림공 25세손으로 1990년 간행한 족보에 등재돼 있다. 진해 거주 조씨(曺氏)들은 1990년에 합천-상주의 창녕조문(曺門) 태복경공파에 들어왔는데, 무려 500년이 지나 조계림공 후손으로 입적한 것이다.

위 자료에서, 조성좌공의 창녕조씨태복경공파(昌寧曺氏太僕卿公派)의 파조(派祖)인 (흥) 할배가 1377년에 종6품인 通禮門(통례문) 祗候(지후)에 재직하고 있었으며, 의 아들인 桂林(계림)공은 진사과에 합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흥) 할배는 '말과 목장일을 관장'하는 기관인 종3품 태복시(太僕寺)의 경(卿, 종3품)이라는 관직을 역임했다. 참고로, 桂林(계림)공의 동생(?)인 중림(仲林)공은 1396년(태조5) 진사에 합격하여 서울시장인 한성부윤(尹, 종2품) 등을 역임했다.

조선 초기에 성(姓)을 가지고 있었던 비율이 10% 정도였다는 사실에서, 조성좌공과 정희량(동계 정온 현손)의 문중이 고려시대부터 명문가 반열에 올라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블로그 '무신혁명(이인좌의 난) 후 조성좌 등 주도층 후손들 동향, 투탁!' 참조: https://blog.naver.com/antlsguraud/150097228713

*: <1> 1728년(영조4) 3월 무신년 봉기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이유익 임서호 정팔룡 조성좌 등 주체세력들이 기존 성리학(주자학) 중심의 이념과 신분질서를 변화시키려 했고, 지방의 수령·병사(兵使)·중군(中軍) 등을 임명했으며, ‘제역감역(除役減役)·불살읍쉬(不殺邑倅)·불살일민(不殺一民)·불탈민재(不奪民財)·물겁부인(勿怯婦人)·환곡호궤군병(還穀犒饋軍兵)’ 실천 강령을 채택하여 시행했기 때문에 ‘무신혁명(戊申革命)’이라고 명명했다. 이른바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1천여 번이나 나온다.

또한 1994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무신역옥추안-해제'에, "1728년(영조4) 무신변란은 조선후기 정치·사회체제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일어난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었다. 분출된 각 계층의 저항 세력이 왕조 교체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정권 교체를 지향했던 역사적 사태였다 "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