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목사 오계 조정립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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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4-06-30 11:14 조회11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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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사벌 출생인 조정융 아버지는 우부승지 조우인(曺友仁, 1561~1625)이며, 조정융 둘째장인은 상주 낙동면의 황간현감 조기원(趙基遠, 부: 좌랑 조정·趙靖)이다. 조기원은 양산군수 조시량(曺時亮, 증손자: 무신혁명 조성좌) 막내사위인 조태윤(趙泰胤, 증조부: 장령 조익·趙翊)의 재종조부다.
호조좌랑 검간 조정(黔澗 趙靖, 1555~1636)은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8개월 지난 1614년(광해6) 10월 11일에 광해가 내린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 1등에 정언 조정립, 현령 조응인, 찰방 조우인, 학생 조정생 등과 함께 녹훈된다. 당시 조정(趙靖)은 군수였다.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1583~1660) 장자인 양산군수 조시량(曺時亮, 1603~1662)이 별세 후 2년이 지난 시점에 조정융이 아래 묘갈명을 지었다. 오계 장자 조시량이 아버지 상중(喪中)인 60세에 작고하지 않고, 1~2년만 더 살았으면 묘갈명을 직접 지었을 것이다.
□ 통훈대부 행 정주목사 오계 조공 묘갈명(梧溪 曺公 墓碣銘)-병서(幷序): 1664년(현종5) 경 재종제(再從弟) 직강(直講, 정5품) 조정융(曺挺融) 지었다. / 오계 공은 나 찬용 11대 조부다.
공(公)의 휘(諱)는 정립(挺立)이요, 자(字)는 이정(以正)이요, 호(號)는 오계(梧溪)로서 창녕조씨(昌寧曺氏)인데, 고려 대악서승 휘 겸(謙)의 후손이다. 상세(上世)에 8대(代)를 연이어서 평장(平章, 주: 정2품)을 지낸 융성함이 있었으며, 그것이 3대파로 나뉘었는데 소감(少監, 주: 종4품) 휘 송군(松君)이 바로 그 계통이다. 고조의 휘는 계형(繼衡)인데 좌부승지이며, 증조의 휘는 언홍(彦弘)인데 진용교위(進勇校尉,정6품 무관)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몽길(夢吉)로 좌승지에 추증 되었는데(주: 상주목사 벼슬이 없음. 1913년 조긍섭이 지은 '조정립 행장'부터 상주목사를 역임했다고 왜곡하고 있음), 비로소 함창으로부터 합천으로 장가들어 그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응인(應仁)인데 대구부사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주: 설학 이대기 여동생)인데 승지를 추증한 득분(得賁)의 딸로서 고려태사 도(棹)의 후손이다.
공을 계미년(癸未年, 1583)에 낳았는데, 어려서 총명하고 준수하여 아름다운 재주가 일찍 드러나고 문장이 스스로 진취되어 앞줄에서 깃발을 날리며 힘들이지 않고 제패하였다. 을사년 사마시와 기유년 대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을 거쳐서 주연(冑筵, 주: 세자시강원)에 들어갔으며 삼사(三司)의 직책도 두루 역임하였다. 다만 그 만난 바가 좋은 때가 아니어서 권력을 장악한 간신들이 사리에 어두운 임금을 끼고서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권세를 부리어, 한 세상의 인물들을 해치었다. 계축년(1613) 이후로는 해괴한 기틀이 더욱 심하였으되, 오직 내가 스스로 의리의 당연함에 편안히 하였던 것만은 확정된 것이 있었다.
정사년(1617) 겨울에 대비를 폐위시키자는 흉측한 의론이 바야흐로 일어났었는데, 공이 이때에 간관(諫官)의 직책이 되어 동지 두어 사람들과 더불어 항언하여 강직한 상소를 올리니, 광해가 진노하여 모두 북쪽 변방으로 축출 전보하여 공은 북청판관이 되었다. 이때에 오성 이상공(李相公, 주: 이항복)이 대비를 폐위시키자는 의론에 절개를 세워 북청으로 귀양 왔다가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돌아가자(주: 광해 10년 1618년 5월), 공은 그에게 제문으로 제사지냈다.
제문에 이르기를, “큰 집이 장차 무너지게 생겼는데, 들보 재목이 먼저 부러졌습니다. 당시의 한마디 말씀이 윤리 기강을 붙잡아 세웠습니다.”하고, 그 만시(輓詩)에는 이르기를,
선조 광해조에 많은 분이 재상에 앉았지만 / 兩朝多少坐司台
명공만이 최고로 걸출하다 손꼽았소. / 獨數明公最傑魁
국가 동량 존재하니 큰 절개를 알았고 / 國棟樑存知大節
동서를 막론하고 뛰어난 인재였소. / 山東西出見全才
영원한 의리 취해 잎처럼 몸 가벼웠고 / 千年取重身輕葉
걱정으로 병이 생겨 사괴꿈을 꾸었소. / 一病綠憂夢食瑰
동남쪽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찍 알진 못했으나 / 生長東南曾不識
가시는 길 애도하니 슬픔이 가득 하구려. / 湘流一弔有餘哀
하였으니, 이것을 관찰해 보면 또한 공이 어떠한 인물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조정융이 조그마한 비석에 영의정 이항복을 추모하는 제문과 만시를 굳이 넣은 것은, 조정립이 1613년(광해5)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이항복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혐의로 처형된 정협(鄭狹)을 천거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으므로 파직시킬 것"을 청했기 때문임.
조정융이 1664년(현종5) 이 묘갈명을 지을 당시 이항복은 충신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했음. 이에 부응하는 내용을 부득이(?) 새겨 후손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일 것임.
무오년(1618)에 변방의 소요 때문에 서북 지방의 문관 수령들을 내지(內地)로 이직(移職)시켜 공은 영덕현령이 되었다가, 계해년(1623) 개옥(改玉) 뒤에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서 귀향하였는데, 갑자년(1624)에 보은현에 부치(부처·付處)되었다가 얼마 뒤(주: 16개월 지나서) 석방되어 (고향 묘산 안성리로 방귀전리돼) 돌아왔다.
병자호란(1636)에 본도(本道)의 감사가 공(公)을 이끌어서 함께 막부에 참여하여, 수비하여 전쟁을 정지시킬 것을 모의하여 서울로 달려가 위문 드렸다. 그때서야 공조정랑(주: 1637년 2월)에 서용되었다가 얼마 뒤에 평양서윤으로 임명되었는데, 병화를 갓 겪은 끝이었지만 말소리와 얼굴빛을 동요하지 않고서 다스린 공적이 크게 드러났다. 신사년(1641)에 체직되어 돌아왔다가 군자정(軍資正, 주: 군자감 정3품)으로 성주목사가 되었다. 이때에 조정(朝廷)에서 공을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좋아하지 아니한 자가 그것을 저지하였다.
을유년(1645)에 담양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부임하지 아니하였으며, 다시 군자정(軍資正)이 되었다가 정주목사로 나가게 되어 길이 서도(西都, 주: 평양)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서도 사람들이 평양의 경계로 나와 옛날 사군(使君, 주: 사신)을 영접 전송하면서 대단히 기뻐하였다. 임기가 이미 만료되었는데도 1년을 더 유임하여 그 다스림이 서도(西都)와 똑 같으니, 두 고을에 모두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기축년(1649) 가을에 우통례(右通禮, 주: 통례원 정3품)로 밀양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적신·賊臣에게 빌붙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고 이항복 등 현상(賢相)을 탄핵했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여)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전원 마을(주: 합천 묘산-봉산면)로 돌아와 수양하면서, 옛날 현인의 학문을 강명(講明, 강구하여 밝힘)하고 후학들을 인도하여,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늙어서도 더욱 독실이 하니 먼 지방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학업을 끝마치고서 돌아갔다. 만년에는 한 정자(주: 금봉서사, 현 봉서정)를 명봉(鳴鳳, 주: 김봉) 시냇가에다 지었는데(주: 1644년(인조22) 12월 건립), 산수가 몹시 뛰어나게 좋고 경계가 깊숙하면서 조용하여, 모래톱과 소나무 숲 속의 오솔길에서 지팡이에 신을 신고서 이리저리 산책하고, 약을 달이는 화로와 차를 끓이는 노구솥에 좌우에는 서적과 역사책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흥이 남을 틈타서 원근 간에 명승지를 선택하여 만년의 맑은 복을 혼자서 누리었다.
1660년(현종1) 9월 17일에 병환으로 돌아가니 수(壽)가 78세였으며, 2월 3일에 거창 견암산 우두산 오향(午向)의 언덕(주: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앞산 3번지)에 장사 지냈다.
공(公)은 타고난 자질이 충실하고 효성스러우며 성행(性行)이 온화하고 유순하여, 집안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외친 간에 친히 지내고 친족 간에도 화목하여 간격이 없었다. 이와 같은 분으로서 처음에는 혼조를 만나 간사한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밝은 시대를 만났지만 주·부(州·府)의 수령에 그치고 말았으니, 진신(縉紳, 벼슬한 사람) 사이에서 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직위가 높이 오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안동권씨(權氏, 주: 1583~1628)에게 장가들었는데 현감 양(瀁)의 딸로서 부인의 도리에 위반함이 없었다. 공보다 33년 앞서서 돌아갔는데 견암(見巖, 주: 고견암)의 묘소가 바로 그 장지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시량(時亮)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다음은 시윤(時胤)인데 문과로 (합천)군수를 지낸 난서(鸞瑞)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딸이 셋에 수사(水使, 주: 정3품 전라좌수사) 이민발(李敏發, 주: 1599~1670, 형조판서 이명 아들), 선비 이전(李瑑, 주: 1607~1668, 하빈현 기곡마을 호조좌랑 이지영 장자)·김시(金蓍, 주: 1619~1658, 남원 산동면 목동마을의 참봉 김지순 아들)는 그 사위이다.
(1624년 보은읍에 귀양 중에 결혼한 21살 어린) 경주김씨(주: 1604~1647)에게 장가[娶]들었는데 (보은읍 종곡리) 증참판 덕민(德民)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시적(時迪, 처부: 1631년 광해복위사건에 연루돼 처형된 함양 출생 양추<梁樞, 부: 이조참판 양희 차남 양홍부>)은 주부이며, 시매(時邁)도 주부이며, 시건(時建)은 통덕랑이다. 여서(女壻)는 이민행·조두우(趙斗佑)이다. 파평윤씨는 2남을 두었는데 시열(時說, 처부: 함양 출생 노형경<盧亨慶, 부: 노수, 조부: 노사위, 증조: 이조판서 노진·盧禛 4촌동생 노상>)·시방(時䢍, 처부: 노륜<盧腀, 부: 노사소, 조부: 이조판서 노진 동생 노관·盧祼>)이다.
*블로그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 가장'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1326878135
(조정립 장자) 시량(時亮)은 2남에 하전(夏全)·하현(夏賢)이며, 6여서(女壻)에 하준(河濬, 주: 1623~1666, 하준·河浚의 오기, 진양하씨 운문파, 상주 출생, 자형: 장령 유천지)·이탁(李桌, 주: '이설·李卨+木'의 오기, 1622년생, 효령대군 9세손, 효령 삼남인 보성군 이합 8세손, 강성도정 이견손 6세손, 묘소: 봉산 봉계리 거안)·김동필(조부: 조정립 두번째 장인인 보은읍 종곡의 김덕민)·이성호(조부: 임실 오수면 둔덕마을 천묵재 이상형)·여용화(부친: 성주 벽진의 선산부사 여효증, 고모부: 대사간 박이장 손자 박원영<朴元榮, 아들: 朴世胄·聖胄, 맏며느리: 조정융(曺挺融, 사위: 朴世胄)의 딸, 둘째며느리: 조하양(曺夏良, 사위: 朴聖胄)의 딸>)·조태윤(趙泰胤, 증조: 상주 낙동의 광주목사 조익)이다. 시적은 3남에 하명·하징·하빈이다. 시매는 1남에 하진(夏振)이다. 시건은 3남에 하영·하근·하귀이며, 1여서에 선비 이석희이다.
*주: 위 시적(時迪)·시매(時邁)·시건(時建)·시열(時說)·시방(時䢍)은 1934년 합천 묘산에서 출간한 창녕조씨족보(갑술보)에는이름이 없음. 갑술보는 합천군 묘산면·봉산면 거주 창녕조씨들 위주로 만든 최초의 족보이고(조정생 11세손인 67세 조학승·曺學承이 서문을 씀), 이 때 이른바 역적인 조덕좌(曺德佐, 조시량 증손)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입적되고, 조정생(曺挺生, 조정립 동생) 막내아들(4남)로 조시무(曺時武)라는 인물도 등재됐는데, 왜 봉산면 김봉 및 압곡에 세거하고 있는 조시적(曺時迪)·시매(時邁)·시건(時建), 그리고 시열(時說)·시방(時䢍) 후손들은 등재가 안 됐을까. 1934년 갑술보 편찬을 주관한 묘산면 안성리 조정생(曺挺生) 후손들이 묘산면 인근 봉산면 김봉 및 압곡에 주로 살고 있던 시적(時迪)·시매(時邁)·시건(時建), 그리고 시열(時說)·시방(時䢍) 후손들을 등재를 안 한 것이 요해가 안 됨. 1960년, 90년 창녕조씨송군 및 태복경공파보에는 이들이 모두 등재돼 있긴 하지만, 특히 시열(時說)·시방(時䢍)의 8세손부터 대수(代數)조차 맞지 않는 등 엉성하게 돼 있음.
또한 조시건(曺時建) 현손서(玄孫壻)가 전의이씨 이병후(李秉厚, 1769~1839, 조한태·曺漢泰 사위)인데, 이병후 고조인 이지국(李之菊)은 참의 이지화(李之華) 사촌동생임. 폐고가 된 합천 조성좌(曺聖佐) 문중과 고령 다산면 상곡 전의이씨(全義李氏) 가문과 결혼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음. 다포 이지화(茶圃 李之華) 증손인 이익필(李益馝, 1674~1751)은, 1728년(영조4) 무신혁명(조성좌의 난) 때 금위영 천총으로 재직하다 병조판서 오명항 휘하에서 별효위 별장(別驍衛別將)으로 차출돼 안성 및 죽산 전투에 공을 세워 15명 분무공신(奮武功臣) 중 3등에 책록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해진 인물임.
이러한데도 무신혁명 후 60년 쯤 지나 합천 묘산-봉산 창녕조씨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대구도호부사) 가문과 결혼한 것은, 윗대에 도촌 손자 및 증손인 조시원(曺時遠)-조하강·하상(曺夏剛·夏相) 등이 전의이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인연도 작용했겠지만, 무신혁명으로 안음 정희량(鄭希亮) 및 문경 조세추(曺世樞) 가문처럼 완전히 파산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음.
김시(金蓍) 및 창녕조씨(정주목사 조정립 막내딸) 묘소, 남원 산동면 목동리 풍곡에 있다. 유학 김시 증조인 영광군수 금릉 김익복(金陵 金益福, 1551~1599), 김화(金澕, 김익복 아들, 김지순 부친)-김연(金沇, 김지성 부친), 김지순(金之純, 김시 부친) 묘소도 함께 있다. 순창군수 김지성(金之聲, 1610~1673, 김지순 사촌동생)의 사위가 조징(曺澂, 1668~1714, 조하현 아들)이며, 조징 아들이 1728년 무신혁명 때 처형 및 정배된 조명좌·희좌·순령이다. 김지순·지성-김시는 무신혁명 때 처형된 부안 우반동 거부(巨富)인 김수형(金守亨, 1688~1728)과 같은 문중이다. <묘소 사진 출처: 김석량·광 후손인 남원 산동면 목동 김종근씨가 보내 옮>
(조정립-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맏사위인 전라좌수사) 이민발(李敏發, 주: 1599~1670, 형조판서 이명 아들)은 자녀가 없어 계후하였다(주: 이민발 배위 창녕조씨는 1600~1663, 묘소: 합천 묘산 조부인 조응인 묘 인근). 이전(李瑑, 주: 1607~1668, 하빈현 기곡마을 호조좌랑 이지영 장자)은 3남에 원주·형주·한주이며, (이전·李瑑은) 3여서(女壻)인데 (진주 단목) 진사 하락(河洛, 주: 河洺·하명의 오기, 1630~1677, 창주 하증 손자, 하달도 아들), 선비 이원기(李元祺, 주: 찰방, 칠곡 석전 李道章 차남, 曺時遂 손위동서), 무과 급제한 윤세형(尹世衡, 주: 거창 살목 출생)이다.
*이민발(조정립 맏사위) 고조부인 이대(李薱, 1488~1543, 증조: 효령 삼남인 보성군 이합, 외손자: 전주부윤 심의겸)는 이혼(李渾, 1513∼1576) 8촌 형님인데, 이혼 증손자가 임실 오수면 둔덕의 천묵재 이상형(天黙齋 李尙馨, 1585~1645, 정언)임. 조시량(曺時亮, 조정립 장자) 둘째사위인 이설(李卨+木, 1622년생)은 효령대군 9세손이고, 효령대군 삼남인 보성군 이합 8세손, 강성도정 이견손 6세손으로 묘소는 봉산면 봉계리 거안마을에 있음. 이상형 손자 참봉 이성호(李聖虎, 1632~1682)는 조시량(曺時亮, 양산군수)의 사위이고, 이성호 사촌동생 참봉 이성진(李聖眞, 1645∼1701)은 조숙(曺淑, 조정립 종증손) 장인임. 이성진 장남인 이이근(李頤根, 1668~1730)은 조하현(曺夏賢, 조정립 손자
(조정립 세째사위인) 김시(金蓍, 주: 1619~1658, 증조부가 남원 산동면 목동 출생 군수 김익복)는 4남에 맏아들은 경기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여서(女壻)에 윤형상(尹衡商, 주: 장수 출생, 남원의 김원팔·곽처웅 등과 1728년 무신혁명과 연계된 1733년(영조9) 괘서(掛書)사건에 연루돼 처형됨)이다. (조정립-경주김씨 사이에 태어난 네째 및 다섯째사위) 이민행과 조두우(趙斗佑)는 모두 후사가 없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삼한(三韓)의 옛날부터 유명한 문벌이요, 만세토록 영원한 유택(幽宅, 묘소)일세. 없어지지 아니할 사적이 비석에 새겨져 있네. 후세에 그것을 증명해 보고 싶으면 청컨대 이 각자(刻字)를 고찰해 보오.
통훈대부 행 성균관 직강(直講) 재종제(再從弟) 조정융(曺挺融)이 짓고, 진사 전기정(全氣正)이 글을 쓰다.
※6촌 동생인 조정융이 지은위 묘갈명에는 '영의정 내암 정인홍'을 폄하하는 내용이 없다. 다만, 아들 조시량이 1661년(현종2)에 지은 조정립 가장(家狀)과 1913년 조긍섭이 지은 조정립 행장과 1913년 장승택이 지은 조응인 묘지에는 '내암 정인홍'을 폄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후대에서 왜곡했기 때문이다.
*블로그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 연보' 참조: https://blog.naver.com/antlsguraud/220902966335
*블로그 (조긍섭이 찬한)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 행장과 무신혁명' 참조: https://blog.naver.com/antlsguraud/221354684738
1996년 2월 18일(일) 설 하루 전 오계 조정립 할배-안동권씨 할매 묘소 앞에서 필자!
정주목사 조정립 및 숙인 안동권씨 묘소(상하분)다.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앞산 3번지(893㎡)에 있다. 상주 사벌면 출생인 6촌 동생 조정융(曺挺融, 1598~1678, 정선군수)이 묘갈명을 지었고, 합천군 쌍책면 출생인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1527~1596)의 증손인 전기정(全氣正, 1633~1697, 진사)이 비문을 썼다. 전기정의 아버지는 김해 김수로왕 비문을 쓴 유학 두암 전형(斗巖 全滎, 1609~1660)이다. 전형은 달성 구지면 박성(朴惺, 1549~1606) 묘갈명도 썼다.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1583~1660) 묘갈명(墓碣銘)이다. 재종제(6촌동생)인 직강(直講, 정5품) 호옹 조정융(湖翁 曺挺融, 1598~1678)이 1664년(현종5) 경 지었다. 1913년 간행한 '오계선생문집(梧溪先生文) 권6'에 실려 있다.
通訓大夫 行 定州牧使 梧溪 曺公 墓碣銘-幷序
公諱挺立字以正號梧溪昌寧吉氏高麗大樂署承諱謙之後上世有聯八代平章之盛其分三大派第二少監諱松君乃其系也高祖諱繼衝左副丞旨會祖諱彦弘進勇校尉祖諱夢吉贈左承旨始目成昌麥于陕仍家焉考詢應仁大邱府使妣全義李氏贈不旨得贅之女高麗太師樟之後生公以皇明萬曆交未幼瑩秀才美风發文華自進揚磨前列不勞而霸登乙已司馬己西大科由成均館人青筵歷職三可第其所遭非時權奸擁暗君作威福以誤一世人物交王以後駭機益甚而惟吾所以自靖者其有定交丁已冬廢大妃凶論方張公時爲諫職與同志數人抗言直疏光海怒立逐補北邊公爲北青判官時繁城李相公立節廢論意配北青卒于讓所公祭之以文有日大度將傾樑木先摧當時一言扶植倫紀其挽詩日兩朝多少坐可台獨數明公最傑魁國棟樑存知大節山東西出見全才千年取重身輕葉一病緣受夢食瑰生長東南會不識湘流一中有餘哀觀此亦可以得公之爲何狀人戊午以邊聳移西北路文官守令於內地公得盈德癸亥改玉後投効歸甲子付置報恩縣尋放還內子之亂本道監可引公與參幕府謀守罷奔問京師始叙工曹正郎俄拜平壤度尹新經兵火之餘不動聲色而治績大著辛已遞歸由軍資正爲星州牧使於是朝廷欲大用公不說者沮之乙酉除潭陽不赴復正軍資出收州路過西都西都人出疆迎送舊使君甚歡爪既滿加任年其治與西都一律兩府皆有去思碑己丑秋由右通禮授密陽不赴途歸養田里講明昔賢引進後學教誨不俗老而愈篤遠方來學者皆卒業而歸為晚築一亭於鳴鳳川上山水總務境界幽靜沙洲松逕杖履遺遙藥爐茶鏽左右書史有時乘興選勝遠近尋享晚節清福康子九月十七日以疾考終壽七十八十二月三日葬于居吕見駿山午向之原公天資忠孝性行和順居家孝友無間媚睦陸如是者而始際昏朝見嫉奸黨終遇明時止於州府籍紳間識公者皆惜其位不滿焉要安束權氏縣監瀁之女婦道無違先公三十三年卒見巖之兆即其葬也有子男長時亮文科次時胤出系文郡守驚瑞后女三水使李敏發士人李球金著其增也娶慶州金氏贈參判德民之女有三男二女長時迪主簿時邁主簿時建通德郎女李敏行趙斗佑坡平尹氏有二男時說時䢍時亮二男夏全夏賢六女河濬(주: 河浚의 오기)李桌(주: 李卨+木의 오기)金東弼生員李聖虎呂用和趙泰亂時迪三男夏明夏徵夏彬時邁一男夏振時建三男夏英夏根夏龜一女士人李碩熙李敏發無子女繼后李瑑三男元柱亨柱漢柱三女進士河洛(주: 河洺의 오기)士人李元祺武科及第尹世衡金著四男長敬基餘幼女尹享商李敏行趙斗佑皆無后以下不盡錄銘日三韓舊閥萬世永宅不朽之蹟有銘在石後欲徵之請考斯刻通訓大夫行成均館直講再從弟曺挺融撰全氣正書